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이(汝以), 호는 분음(汾陰). 최기(崔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명필(崔命弼)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희(崔禧)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3년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을 거쳐 병조와 예조의 좌랑, 우승지·도승지·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건너가 본국의 위급한 상황을 예·병 양부(兩府)에 보고하고 돌아왔으며, 다시 1598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 경략 양호(楊鎬)의 전임(轉任)을 진주하였다.
이어 해주목사·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03년 대사헌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 실록의 중간(重刊)에 참여하고, 대사간,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소북파 영수 유영경(柳永慶)과 결탁하였다가 정인홍(鄭仁弘) 등의 모함으로 삭직되고, 1611년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고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며, 1616년 김제남(金悌男)의 일파로 몰려 온양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