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김인수의 자는 국서(國瑞), 호는 치재(致齋) 혹은 갈산(葛山)이라 하였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그는 1922년 30세에 이정규(李正圭)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다. 김인수는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長延面) 오가리(五佳里)우령촌(牛嶺村)에서 살았으며 1903년 12세 때, 사미면(沙味面) 오당리(五堂里) 갈마현(渴馬峴)으로 이주하였다.
이 책은 갈마현으로 이주한 후에 쓴 것이므로 후자의 주소에서 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 20년 만인 1922년에 주소를 옮기게 되는데, 중원군 동량면(東良面)하곡(荷谷)이다. 하곡에서는 1922년부터 1955년까지 28년 간 살게 되며, 이때의 일기는 그 지명을 따서 ‘하곡일기(荷谷日記)’라고 부른다.
52책. 필사본. 원본은 가로 19.5cm, 세로 18.5cm.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영인·간행되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한 이듬해인 1911년 정월 초하루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962년 별세하기 3일 전까지 쓴 장편일기이다.
그의 나이 21세에 집필을 시작해 71세가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일기란 제각기 다른 이유 때문에 쓰는 법이지만 김인수의 일기에는 망국이라는 절망적 상황과 이에 굽히지 않고 일본에 항거하여 수절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지 낙장에다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일 년치를 다 쓰고 나면 한 책으로 묶어 보관하였다. 그러나 이 일기를 소장해 온 필자의 맏아들 김용숙(金容肅)에 따르면 1979년 홍수 때 두 책을 유실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유실된 두 책이 맨 앞의 1책(1911)과 마지막의 1책(1962)이어서 중간에 빠진 것이 없다. 또한 김인수가 향년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해인 1962년을 전후로 하여 남긴 문집 『치재집』(총3권)을 일기 2권의 말미에 실었다.
이 책은 권력의 핵심이나 주변에 살았던 사람의 기록은 아니다. 도리어 권력에서 소외된 일기이므로 그만큼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일기의 내용은 그날그날의 날씨부터 시작하여 집안의 대소사와 인근의 경조사가 먼저 기술되어 있으며 시국에 관한 소문과 그에 대한 논평이 드문드문 나오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지루한 일상생활에 관한 기록이 많다.
이 일기의 주요내용을 보면, 1910년대에는 일제가 강행한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사항과 헌병들의 동태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20년에는 공진회, 전염병, 피폐한 농민들의 상황, 융희황제의 국상에 관한 내용이 특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1930년대에는 중일전쟁, 시국강연회, 국민정신총동맹에 관한 기록들이 보인다. 1940년대에는 물자배급 상황의 어려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의 일기에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6·25전쟁과 피난에 관한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다. 말미에 수록한 『치재집(致齋集)』에는 이 책과 관련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1945년 8·15해방의 감회를 적은 「을유해방기(乙酉解放記)」와 한국전쟁 당시 참담한 민족의 단장(斷章)을 기록한 「경인동란실기(庚寅動亂實記)」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이 집안의 대소사나 인근의 경조사 등에 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기는 하지만, 이 일기는 구한말에서 일제 하, 그리고 8·15해방 이후까지 수구정신으로 일관한 한 선비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일제의 지배정책, 중일전쟁, 해방, 6·25전쟁 등 굵직한 근현대사의 주요사건들이 지방농촌에서 관철되는 실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