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2월 16일 오전 11시 38분 창랑호는 승객 28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부산 수영(水營)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여객기가 평택 상공을 통과할 무렵 괴한들이 총기를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고 저항세력으로 보이는 군인들을 쇠몽둥이로 눕힌 다음 조종사실로 뛰어들었다. 창랑호는 7,000m 고도로 포천 상공을 지나 납치당하였다.
범인들은 간첩 기덕영(奇德永)의 조종을 받은 황해도 사리원출신 김택선(金澤善)·길선(吉善)형제와 반공청년이던 김순기(金順基)·최관호(崔寬浩)와 김형(金亨) 등 5명이었으며, 월북동행자로 김애희(金愛姬)·김미숙(金美淑, 본명 信子)이 있었다.
납치범들은 여객기가 평양부근 30마일 지점 상공에 이르자 북한측에 알리기 위하여 모포 3매를 떨어뜨리고 평양 상공을 통과하여 순안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비행장에는 미리 기다리기나 하였다는 듯이 북한군 상좌가 나와 한 사람씩 승객들을 끌어내렸다.
일행 중에는 국회의원 유봉순(兪鳳淳)과 공군 정훈감 김기완(金基完)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즉각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승객과 기체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그 해 3월 6일 납북승객을 송환한다고 발표하였고, 같은날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회의에서 인수절차가 논의되었다. 7명의 월북자를 제외한 승객들은 같은 날 오후 7시 정전위원회 회담장 앞뜰을 지나 귀환하였다. 간첩 기덕영은 후일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