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항산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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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부터 1943년 사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 뒤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가 중국 타이항산맥[太行山脈] 일대에서 일본 침략군과 싸운 일련의 전투.
내용 요약

타이항산 전투는 1941년부터 1943년 사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가 중국 타이항산맥[太行山脈] 일대에서 일본 침략군과 싸운 일련의 전투이다. 타이항산맥은 북경 남쪽에 위치한 허베이성과 산시성의 경계에 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황하 이북인 화북 진출을 결의하며 1941년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후자좡(胡家庄)전투·싱타이전투·폔청(偏城)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하며 만주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43년 반소탕전 때 근거지가 크게 파괴되면서 타이항산에서 옌안[延安]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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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1년부터 1943년 사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 뒤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가 중국 타이항산맥[太行山脈] 일대에서 일본 침략군과 싸운 일련의 전투.
내용

타이항 주1은 보통 타이항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중국 북경의 남쪽에 위치한 허베이성[河北省]과 산시성[山西省] 경계에 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란,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혁명자연맹 · 조선혁명청년연맹 등의 민족운동 좌파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1938년 10월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가 1941년 7월 화북에서 결성한 전투지대를 말한다.

조선의용대는 원래 황하(黃河) 이남인 화중(華中)이나 화남(華南) 지방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는데, 1940년 11월 4일 충칭[重慶]에서 황하 이북인 화북 진출을 결의하였다. 그 뒤 본부 요원만 충칭에 남고 모두 뤄양[洛陽]에 집결, 1941년 3월 맹진(孟津) 나루를 건너 화북의 린현[林縣]으로 가 그 곳에서 그 해 7월 10일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 박효삼(朴孝三) 아래에 3개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제1대는 이익성(李益星), 제2대는 김세광(金世光), 제3대는 왕자인(王子仁)이 대장이었다.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이동한 것은, 일본군에 점령을 당한 곳이기는 하나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고국이나 만주와 가까워 경우에 따라서는 만주로 진출할 수도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북경에서 정저우[鄭州]로 내려가는 징광선(京廣線) 연변에 주둔하였다. 스자좡[石家莊] 남쪽으로 위안지현(元氏縣) 일대에 제2대가 배치되었고, 싱타이[邢台] 근방에는 제3대, 그리고 츠현[磁縣] 일대에 제1대가 배치되어 일본군 주둔지 안에 살고 있는 동포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인원도 모집하였다. 그리고 중국군과 함께 전선에 나아가 일본어로 선전활동도 전개하였다.

화북지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는데, 개편하기 전의 1년간 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 가운데에서도 후자좡(胡家庄)전투 · 싱타이전투 · 폔청(偏城)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후자좡전투는 1941년 12월 12일에 있었다. 12월 12일 스자좡 근방의 전선에 나가 3일간 선전활동으로 일본군의 전열을 교란시킨 김세광의 제2대가 위안지현, 후자좡 마을에서 머물렀다. 후자좡은 타이항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서, 그 아랫마을에는 중국국민혁명군 제팔로군(중국공산당군)이 주둔하고 있어 안심하고 숙영을 하였다.

그런데 마을의 한젠[漢奸: 중국인의 일본 앞잡이]이 일본군에게 조선독립군의 주2를 밀고,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제2대는 29명의 병력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타이항산 속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金學鐵) 대원이 부상하는 피해를 보았다. 후자좡전투의 피해는 컸지만 일본군이 조선의용대 숙영지를 찾아 습격한 것을 보면 그만큼 조선의용대의 전선공작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싱타이전투는 후자좡전투에 이어 12월 26일에 있었다. 싱타이는 왕자인의 제3대가 활동하던 지역인데, 여기에서도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4명이 전사하였다. 후자좡과 싱타이전투로 조선의용대는 만주로 진출할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징광선 연변의 위험지대에서 제팔로군 제129사단 본부가 있는 타이항산 속의 셰현[涉縣] 일대로 이동하였다.

폔청전투는 1942년 5월 28일에 일어났다. 폔청은 허베이성 셰현의 북쪽 가장자리 산시성 경계에 위치한 곳이다. 폔청전투는 그 해 5월에 감행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작전에 대항한 제팔로군의 반소탕전이 극도에 달한 전투로, 허베이성 셰현과 그 이웃인 산시성 랴오현[遼縣]에서 전개된 전투가 특히 치열하였다. 이 때 제팔로군 부참모장 쭤촨[左權]이 전사하는 등 중국군의 피해도 컸다. 산시성 랴오현은 오늘날 쭤촨현으로 불린다.

폔청전투에서 조선의용대 정치위원으로 활약하던 윤세주[尹世胄, 별명 석정(石鼎)]와 김창화[金昌華, 별명 진광화(陳光華)]가 전사하였다. 두 사람은 쭤촨과 함께 셰현 스먼촌[石門村]에 묻혔는데, 그 해 10월 10일 세운 묘비에 ‘ㅈ ㅗ ㅅ ㅓ ㄴ ㅁ ㅣ ㄴ ㅈ ㅗ ㄱ ㅇ ㅕ ㅇ ㄹ ㅕ ㅇ(조선민족영령)’이란 글귀를 새겨 놓았다. 이 묘비는 지금도 타이항산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그 해 7월 10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제팔로군에 있던 무정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타이항산전투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43년 6월의 반소탕전 때 조선의용군 근거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 해 12월 조선의용군은 타이항산에서 옌안[延安]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김원봉연구』(염인호, 창작과 비평사, 1992)
『조선민족혁명당의 통일전선』(강만길, 화평사, 1991)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연변 인민출판사, 1987)
「조선의용군의 활동과 유적」(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93)
「항전별곡」(이정식·한홍구, 『거름총서』 8, 1986)
「1942년 5월 반소탕전」(서병곤, 『신천지』, 1946. 3.)
「봉화」(『중국조선족역사족적총서』 3, 북경 민족출판사, 1989)
주석
주1

중국 화베이(華北), 산시성(山西省)과 허베이성(河北省) 사이를 남북으로 뻗은 산맥. 쥐라기 때에 형성되었으며, 철ㆍ석탄 따위의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최고봉 샤오우타이산(小五臺山)의 높이는 2,870미터. 우리말샘

주2

군대가 병영을 떠나 묵는 장소. 우리말샘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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