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0년대 전반기 중국 태항산 일대에서 대일 항전 활동을 전개했던 한인 무장 선전 조직이다. 1935년 남경에서 창설된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중국 항일 전선의 변동에 따라 중국군에 배속되자 대원들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어 무장 선전 활동, 적구 조직 공작, 간부 양성, 생산 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이후 일본군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북, 화중 각 지구에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남경(南京)에서 중국 관내 지역 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창설된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인 1938년 10월 대일 항전의 보루 무한(武漢)에서 무장 조직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총대장은 김원봉(金元鳳)이었고, 1940년 2월 무렵의 조직은 본부요원 94명, 제1지대 지대장: [박효삼(朴孝三)] 9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李益星)]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金世日)] 63명이었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중국 항일 전선의 변동에 따라, 무한에서 계림을 거쳐 1940년 3월에는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선전 활동은 조선의용대 내부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결국 화북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대원들은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태항산 지역에서 기존의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되었다.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화북지대 결성 당일인 1941년 7월 7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40일 동안 화북지구 활동 준비의 일환으로 벌인 대토론회를 거쳐 무장 선전 활동, 적구(敵區) 조직 활동 등 활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무장 선전 활동은 무장한 채로 중국 민중, 일본군 그리고 한인 동포에 대하여 항일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이었다. 한중일 언어에 능통했던 의용대 대원들은 대일 선전 활동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화북 지방에서 무장 선전 활동, 적구 조직 공작, 간부 양성, 생산 활동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역시 무장 선전 활동이었다.
중국 민중에 대한 선전 활동은 좌담회, 연환회(聯歡會), 군중집회 등의 형식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제1차 무장 선전 활동(1941.9.5~10.20)은 대부분 중국 민중에 대한 선전 공작에 할애되었다. 화북지대는 좌담회를 통해 조 · 중 민중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며, 현지 정형을 파악하고 공동 투쟁의 목표와 진행 방법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좌담회가 중국 군정, 민간단체 간부들과의 회합이라면 연환회는 간부는 물론이고 일반 성원까지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었다. 화북지대가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군중집회였다. 무장 선전대는 낮에는 주로 준비 사업을 하고 밤에 적 점령구로 들어가 군중 선전과 적군 와해 사업을 벌였다.
화북 지대원들은 전선 지구 일본군에 대한 선전에도 힘을 쏟았다. 이때 문자 선전 수단을 많이 활용하였다. 문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 민중에게는 군중집회 같은 구두 선전에 주력한 반면 일본군에 대해서는 주로 전단을 살포하거나 표어를 부착하여 반전을 선전 선동하였다. 구두 선전 즉 대적 함화 선전도 병행하였다. 화북지대는 전단을 살포함과 아울러 적에 대한 기습과 통신선, 교통로 파괴 활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화북지대는 제2차 무장 선전 활동(1941.11~1942.3) 시기에 접어들면서 화북에 이주해온 한인에 대한 공작을 주목표로 삼고 북상했다. 선전과 아울러 적구 내 조직 활동도 전개하기로 했지만 한인들이 일본군의 통제가 심한 적 점령 지역 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웠다. 따라서 화북지대는 주로 선전 활동 그것도 전단 살포, 표어 부착 같은 방식을 택하였다. 이들 수단을 통해 조선의용대의 존재와 주장이 중국인 혹은 일본군을 통해 적 점령지역 한인에게 전달되는 간접 방식이었다. 조선 동포를 향한 이러한 선전 활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설립 후 호가장전투(胡家庄戰鬪, 1941.12.12)와 형태전투(邢台戰鬪1941.12.26), 편성전투(偏城戰鬪, 1942.5.28) 등 국민당 지구에서는 겪지 못했던 전투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전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원래 무장 선전 공작에서 전투는 가급적 회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조선의용대를 소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해 올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위 차원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2차 무장 선전 활동 기간 조선의용대가 팔로군과 함께 치렀던 전투가 10여 차례 있었으며 화북지대 단독으로 싸웠던 것이 2차례였다. 이에 대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된 이후 무장 선전 활동은 의용군 대오의 역량 손실을 막기 위해 팔로군의 적극적인 보호 하에 전개되었다. 그리고 한 지역에 집결하여 활동했던 의용대 시기와는 달리 적의 기습을 받을 경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북, 화중 각 지구에 분산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및 조선의용군이 설립되는데 기본 대오를 형성하였다. 또한 화북지대가 수행한 호가장전투, 형태전투, 편성전투 등 대일전투는 조선의용대의 명성을 드높였다. 후일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등 연안파가 조선 대중에게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