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7월 중국 화북 태항산 지역에서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심이 되어 일제 패망 때까지 활동했던 한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1941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가 이듬해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43년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임시정부 세력과 협동전선 구축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의 건국동맹과도 연대를 추진하였다.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북한으로 귀국한 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수십 명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화북 지역의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항일 근거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민당 지구에서 북상해 온 조선의용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1월 중공 팔로군 전방사령부의 소재지인 산서성 태항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이하 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태항산 기슭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청년연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이하 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대회에서는 독립동맹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김두봉(金枓奉), 무정(武亭), 최창익(崔昌益), 박효삼(朴孝三), 김학무(金學武), 채국번(蔡國蕃), 김창만(金昌萬), 한빈(韓斌), 이유민(李維民), 진한중(陳漢中), 이춘암(李春岩) 등 11명을 선출하였다.
독립동맹의 주요 구성세력은 무정 등 중공의 항일대오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들과,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연안으로 온 최창익 · 한빈 등의 공산주의자 그룹, 그리고 국민당 정부 지역에서 이동해 온 박효삼 · 이춘암 등 민족혁명당의 주요 성원들과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대회에서는 첫째, 본 동맹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전복하고 독립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을 건립한다, 둘째, 본 동맹은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 개의 지방단체로서 조선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이를 지도할 것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보통선거제 실시, 국민 기본권 확보, 남녀평등,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 분배 등을 표방하였다.
독립동맹은 1942년 11월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를 개교하여 항일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주로 조선 혁명 운동사, 사회 발전사, 초보적 군사학 등을 교수하였다.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는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학교(華北朝鮮靑年軍事政治學校)로 개칭되었다. 졸업생들은 독립동맹 및 조선의용군이 전개한 항일운동의 기본 대오로서 활동하였다.
독립동맹은 청년연합회 시기부터 화북 각지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독립동맹 분맹을 결성하였다. 1944년 이후에는 화중 지방, 산동성 등지에도 분맹이 결성되었다. 각 분맹은 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회의 지도와 현지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협조 및 지도 아래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독립동맹은 산하의 무장 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대일 전투에 참가하면서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는 손실을 입었다.
일제 패망 직전 독립동맹은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독립동맹 간부 이상조(李相朝)는 만주로 들어가 현지의 민족 운동가들과 합세하여 1943년 10월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일제 패망이 다가오자 독립동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과 협동전선 구축을 모색하였으며 국내의 건국동맹과도 연대를 추진하였다. 독립동맹 지도자 무정은 1944년 국내의 여운형에게 공작원을 파견하여 그와 연계하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갑작스러운 일제의 항복으로 중단되었지만 이는 국내외 주요 독립운동 세력이 일제의 패망과 해방 정국을 염두에 두고 한인 세력의 통일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일제 패망과 함께 조선의용군은 심양 등지로 이동하며 동북 지방의 한인 세력을 흡수하였다. 이들은 조직을 확대하면서 국내 진입을 위해 압록강 대안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소련군 휘하의 보안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개인적으로 입국하였다. 독립동맹의 지도자들은 북한으로 귀국한 후 1946년 2월 제3차 대표 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으로 개편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과 더불어 광복 직전 중국 관내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세력으로 중국 관내에서 일제가 패망하는 날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광복 후 북한에서 조선신민당을 창당하고 북한 정권 내에서 이른바 연안파라는 최대의 정치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무정의 숙청을 시작으로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이들의 존재는 북한의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