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독립청년당은 1944년 12월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한인 군속으로 동원된 한인 청년들의 일본군에 대한 저항 의거를 이끌었던 반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2년 조선군에서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여 약 3,000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훈련시켜 동남아 지역에 배치하였다. 한국인 군속 1,400명이 인도네시아 자바의 연합군 포로 감시에 강제 동원되었다. 한인 군속들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하여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반란을 준비하였다. 1945년 1월 암바라와에서 의거하여 3일간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순국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한인들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로 강제 동원되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연합국 병사 26만 명 이상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일제는 포로수용소의 감시 요원으로 한국인과 대만인을 군속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에서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여 약 3,000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교육을 마친 3,000명의 한인 청년들은 그해 8월부터 동남아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럼으로써 동남아 지역에서도 일제에 항거하는 한인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42년 9월 14일 저녁 한국인 군속 1,400명은 부산을 출항한지 26일 만에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항에 도착하였다. 인도네시아 자바에 군속으로 온 한인 포로 감시원들은 연합군 포로 감시에 동원되었으며 그후 1944년 6월에 가서야 그 임기가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인 군속들을 돌려보내주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한인 군속들과 일본군의 갈등은 심해졌다. 더욱이 한인 군속들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우선 자카르타 지역 내에서의 조직을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이활(李活)〔본명 이억관(李億觀)〕이 한인 군속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2월 30일 새벽 한인 군속들을 모아 교육대 취사장 뒤편에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강령, 선언문, 당가까지 작성하였다. 당 조직은 지도자에 총령, 그 밑에 군사부장, 조직부장을 두고 여타 책임 부서에는 지구 책임자를 두기로 하였다.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세포당 포섭과 반란 준비의 책임을 지고 지하공작을 하던 손양섭(孫亮燮)을 포함하여 한인 군속 6명이 말레이 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 명령을 받았다. 1월 4일 전속 명령이 하달되자 이활은 당원 손양섭 및 그가 포섭한 당원 민영학(閔泳學), 노병한(盧秉漢) 등과 중부 자바 암바라와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은 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를 탈취하였다. 이에 출동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손양섭 등은 최후의 순간에 자결하였다. 3일간 싸움에서 일본인 12명이 사살되었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일본군은 한인 군속들의 저항이 두려워 대규모 전속을 실시하였다. 이를 거부한 이활을 비롯한 고려독립청년당 당원들은 일본 선박 탈취를 시도하는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이 누설되면서 고려독립청년당의 전모가 드러났다. 청년당 관련자 10명이 자카르타 일본군사령부로 끌려와 군사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암바라와의거에서 순국한 손양섭, 노병학, 민영학 3명에 대해서는 광복 후인 1946년 1월 6일 현지 조선인민회에서 위령제를 거행하였다.
태평양전쟁 이후 인도네시아 자바로 강제 동원된 일본군 한인 군속들은 연합군 포로 감시에 종사하면서도 일본군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반일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함으로써 이역에서 항일 민족의식을 과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