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0월 중국 무한(武漢)에서 중국 관내 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으로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김원봉(金元鳳)을 총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선전 활동은 조선의용대 내부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결국 화북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대원들은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태항산 지역에서 기존의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로 개편되었다.
김세광(金世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 20여 명은 하북성 원씨현(元氏縣), 찬황현(贊皇縣) 일대에서 무장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2대 대원들은 1941년 12월 2일 원씨현 경내에서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 후 화북지대 제2대는 원씨현 공작을 끝내기 위해 현 민중대회를 12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의용대의 동향을 세밀히 주시해 오던 일본군은 12일 새벽 300여 명을 동원하여 제2대가 숙영하는 호가장 마을을 포위하였다.
12일 새벽 총성에 놀란 전 대원은 적이 벌써 2리 정도에 와 있음을 알았다. 대원들은 짐을 꾸릴 사이도 없이 총만 가지고 집합하여 북쪽 고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적의 맹렬한 사격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었으나 역시 적의 사격이 맹렬하였다. 포위당한 것을 알고 다시 고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원들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대응 사격하면서 적의 포위선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몇 배나 강한 적의 화력을 뚫고 대부분의 대원은 탈출했으나 손일봉(孫一峰), 최철호(崔鐵鎬), 왕현순(王現淳), 박철동(朴喆東) 등 4명은 전사하였다. 대장 김세광, 분대장 조열광(趙㤠光), 대원 장례신은 부상당하였으며, 대원 김학철(金學鐵)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8명, 중경상 32명의 손실을 입었다.
호가장전투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전투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용대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양 지구에서는 호가장전투 전사자에 대한 추도식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팔로군 근거지에서 중공은 이 전투 전모를 소학교 교과서에 싣기로 결정하기까지 하였다. 호가장전투는 조선인의 대일 항전의 의지를 해외 한인과 중국 민중에게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