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는 상해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인 홍구 지역에 살던 일단의 한인들을 친일 한인 자치 조직으로 묶어 프랑스 조계의 항일적인 한인 사회에 대항시키고자 하였다. 상해 지역 한인 사회의 버팀목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자 홍구 지역의 친일 한인들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이후 일본 총영사관은 프랑스 조계 지역의 한인들을 관리 감독이 용이한 홍구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이들 한인들을 친일 조직으로 묶어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상해 한인 사회의 자치 조직이자 일본 총영사관의 정책을 수행하는 행정 보조 기구로서 상해거류조선인회(上海居留朝鮮人會)가 조직되었다.
임시정부가 탄생한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 항일적인 상해 한인 사회를 무력화시키려는 일제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1년 일제는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인 홍구 지역에 살던 일단의 한인들을 친일 한인 자치 조직으로 묶어 프랑스 조계의 항일적인 한인 사회에 대항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친일 한인들의 세력이 아직은 미미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친일 교민 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를 탈출한 이후였다. 1933년 조직된 상해거류조선인회는 1941년까지 활동하였다.
1941년 이후 조선 국내의 내선일체 및 황국신민화운동의 영향은 국외에도 파급되었다. 그 결과 상해를 비롯한 중국 등지에서도 내선일체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인회’ 등의 민족적 분위기를 풍기는 단체들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상해거류조선인회는 1941년 3월 상해일본인거류민단에 통합되었으며 한인들의 자치 업무도 이 단체에 인계되었다. 조선인회가 일본인거류민단에 합병된 후 후계 단체인 계림회(鷄林會, 1941∼1945)가 결성되었다. 계림회는 한인간의 친목 도모를 명목으로 설립되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한인들을 내선일체운동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림회는 일제의 내선일체운동에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모양을 갖추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이와 같이 상해거류조선인회는 비록 내선일체를 위해 해체되었지만 그 조직적 기반은 계림회로 계승되었다.
조선인회는 교육기관을 세워 한인 2세에 대한 식민지 교육을 수행하였으며 “일확천금을 꿈꾸고” 상해에 몰려오는 한인들을 통제, 송환시키는 등 일제의 상해 지역 지배 정책에 협력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떠난 지 오래되는 상해 한인 사회 유지들을 조선시찰단이라는 명목으로 파견하여 친일 인사로 포섭하고 다시 이들을 통해 친일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경의 임시정부를 회유하는 방송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상해의 일본인거류민단과 더불어 일본군 후방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다. 매일 수백 명의 한인들이 조선인회의 지휘 하에 군수품을 운반하거나 임시 비행장 및 진지 구축 노역에 동원되었다. 피난 일본인을 위한 식량 운반, 통역, 운전사 자원 혹은 정보 수집, 사망자 및 부상자 수용과 보호, 시가지 청소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인회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혼잡 속에 피난민을 가장하고 잠입하는 한인 독립 운동가들을 경계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자경단과 협력하여 항일적인 한중 민중들을 탄압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조선인회는 일제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일본 외무성뿐만 아니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으로부터도 감사편지와 금일봉이 증여되었다.
조선인회의 일본군 지원 활동은 1938년 중일전쟁이 장기화된 후에도 국방헌금모집운동 등을 통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인회는 상해, 나아가 중국 화중 지역 전체 한인에 대한 ‘중추 지도 기관’을 자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도 “화중·화남 지역에 친일의 모체가 탄생했다”는 극찬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근거지였던 중국 상해에서 일부 친일 한인들이 일본영사관의 지원 하에 친일 교민 자치 단체 상해거류조선인회를 조직하여 1941년까지 교민들을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에 대한 협력에 동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