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한인들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는 독립운동가들 외에도 학생,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한인들이 이주하면서 소규모의 교민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8년 가을 상해 교민들의 편의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교민 단체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上海高麗僑民親睦會)가 조직되었다.
친목회는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친목회는 상해대한인민단(上海大韓人民團)이라 개칭하고, 여운형(呂運亨)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단원의 자격으로는 상해에 여러 해 동안 거류했거나, 가족과 함께 사는 자 및 상당한 직업을 소유하고 있는 자로 제한하였다. 회비는 입회비 1원과 월 회비 20전으로 정하였다.
친목회는 설립 직후 회장에 신석우(申錫雨)[일명 신헌민(申獻民)], 총무에 여운형이 선임되었다. 친목회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따라 교민이 증가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3월 3일 1백여 명의 상해 교민이 참석한 가운데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중국환구학생회관(中國寰球學生會館)에서 고종황제 봉도식(奉悼式)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독립운동의 지원을 위한 단체의 조직에 합의하고, 규칙제정위원 10인을 선출했다. 이 자리에서 확인된 회원은 345명이며, 구국 의연금으로 1140원을 거두었다.
1912년 상해 지역 한인 독립운동 단체이자 교민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이어 1918년 상해 지역 한인 교민 단체로 조직되어 1919년 9월 상해대한인민단(上海大韓人民團)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상해 지역 한인들의 안전 및 보호 활동에 종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