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반일시위운동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서전 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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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 서전 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여파는 국외에까지 파급되어 국외 어느 곳이나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주지역에서도 북간도 등지에서 한인들의 치열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북간도에서는 용정과 연길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서울 및 각지에서 이미 독립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촌 북쪽의 서전 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3일 서전 벌에는 수많은 한인들이 모였다. 상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이날 모인 망국의 한인이 3만 명을 헤아렸다고 하였다.

낮 12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사전에 준비된 조선독립축하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장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포고문 낭독이 있은 후 시위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들이 앞장 서고 그 뒤를 이어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한편 일본 외무성과 군부에서도 간도의 한인 거사를 구실삼아 군대 투입을 획책하고 있었으며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동북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일제의 무력 간섭을 두려워한 나머지 길림독군과 성장에게 한인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지시했다. 3월 13일 당일 중국 군경은 용정 시가를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길림육군 맹부덕(孟富德)은 몰려오는 시위대를 맞아 결국 발포령을 내리고 말았다. 총성이 울리면서 무수한 시위군중이 쓰러졌다. 중국 군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3명의 시위대원이 희생되었으며 부상자는 30여 명이 넘었다.

결과

이날 시위운동으로 공덕흡(孔德洽)을 비롯한 17명이 순국하였다. 시위대가 해산된 후 구춘선(具春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국자가로 가 일본영사관과 결탁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연길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날 밤에는 주요 지도자들이 연길에 모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모체가 되는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고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순국자들의 장례식을 3월 17일 국민장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13시위운동 희생자들의 유해는 이날 5천여 한인 회중들의 애도 속에 용정 남쪽 10리 되는 허청리의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되었다.

의의와 평가

3·13반일만세시위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염원과 공동체의식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일제하 지속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펼칠 수 있는 사상과 조직의 기초를 닦았다.

참고문헌

『신편 한국사』 47-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국사편찬위원회, 2001)
『국외 3·1운동』(김병기·반병률,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집필자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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