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으로 조선의용대에서 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1932년 10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에 입학하여 1933년 4월에 졸업하였다. 그 뒤 교관이 되어 1933년 9월∼1934년 4월에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과정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민족혁명당 중앙군사학 편찬위원으로 군사학 편찬에 종사하였다. 1936년 3월 무렵 김원봉(金元鳳)의 추천으로 남의사(藍衣社) 비밀훈련소에 입소하였고, 1937년 12월∼1938년 5월에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후에 강릉분교) 한인반에서 학생 겸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5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대회에 참여하여 중국 관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원봉을 지지하였다. 10월에는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제1구대 부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에는 남악(南嶽)의 서남유격간부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고, 그 해 말 조선의용대 제3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에는 강서성 일대 전선에서 항일선전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해 하반기에는 부대를 이끌고 중경(重慶)으로 이동하였다가 1941년 여름에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 팔로군(八路軍) 지역으로 이동할 때 함께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지대장이 되었다. 12월에는 하북성 원씨현(原氏縣)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팔 하나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1942년 7월에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결성 후 팔로군 진서북 군구로 가서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서북 분맹 책임자가 되었다. 해방 직후에 북한으로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