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간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 정치지도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함경북도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무렵 중국으로 건너가 4월에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조선민족혁명당 특무부에 배속되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앙군관학교 성자분교(후에 강릉분교) 특별반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하였다. 같은 달, 호북성 강릉(江陵)에서 개최된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대회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0월에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구대 정치지도원이 되었고, 1940년 2월에 조선의용대 제1지대 정치지도원과 총무조장,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1941년 초에 조선의용대 제3지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을 때, 중경(重慶)에 남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활동하였다. 1941년 10월에는「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에 실린 글에서 조선의용대가 민족의 대오로서 자주 독립부대라고 강조하였고,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둘 것을 주장하였다. 1943년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겸 선전부 차장,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해방 직후 동북 지역의 통화(通化)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이홍광지대(李紅光支隊)에서 교관을 지냈고,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공화당 간부를 지냈다. 그 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2년 10월 민주조선사 편집부국장, 1956년 5월 노동출판사 부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