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대본부가 발행한 간행물로, 총 42기가 발간되었으며, 43기부터는 ‘조선의용대’로 제목이 바뀌었다. 1기∼27기는 순간(旬刊)으로 발간되었고, 28기부터는 반월간(半月刊)으로 발간되었지만, 그 뒤로는 사실상 월간 또는 부정기 간행물이 되었으며, 판매본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의용대통신은 계림에 도착하여 선전 공작을 진행하던 조선의용대 대본부가 한중간의 연합 항일 공작을 올바르게 전개하기 위한 문제를 토론하고, 업무상의 경험과 교훈을 서로 교환하면서 결점과 강점을 서로 비평하기 위하여 발간하였다.
조선의용대통신은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총 42기가 발간되었다. 창간호와 2호는 남아있지 않다. 3호∼8기의 발행·통신처는 ‘광서성 계림시 계서로 신지서점(廣西省桂林市桂西路新知書店)’이고, 9기∼22기의 그것은 ‘계림시 수동문외 동녕가1호(水東門外東寧街1號)’이며, 23기∼33기는 ‘계림시 수동문외 시가원53호(施家園53號)’에서 발간되었다. 그 뒤 본부의 이동에 따라 34기는 중경(重慶)의 ‘양로구 중삼로63호 부호(兩路口中三路63號附號)’에서, 35기∼42기는 ‘남안 탄자석 대불전(南岸彈子石大佛段)’에서 각각 발간되었다.
조선의용대통신에 게재된 글은 모두 486편인데, 추도 특집에 게재된 만사(輓詞)와 창설기념호에 게재된 휘호(揮毫)를 제외하면 372편이다. 이 가운데 정세분석을 다룬 글이 165편(44%)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국제정세와 해방운동 일반, 한중연합문제, 중국전쟁상황, 일본침략정세와 일본국내 관련소식, 전방소식과 격려의 글 등이다.
집필자는 모두 113명이다. 그 가운데 이달(李達)이 가장 중요한 논객이면서 잡지 발간을 주도하였다. 그 외에 유금용(劉金鏞)과 왕계현(王繼賢)·한지성(韓志成)·이정호(李貞浩)·교시(喬矢)·윤위화(尹爲和) 등이 꾸준히 발간을 담당하면서 10차례 이상 원고를 게재하였다.
조선의용대통신의 내용은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의용대의 활동이 주로 게재되었다. 곧 제1구대의 최전방 활동과 제2구대, 제3구대 및 조선의용대 대본부의 활동상이 정리되어 있다. 둘째,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격려하고 조언하는 중국인들의 글도 많이 실렸다. 그 가운데는 기념집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옮긴 것도 있고 새로이 기명(記名)으로 투고한 것도 있다. 이 글 중에는 조선인의 처지를 동정하고 조선인의 저항운동을 찬양하는 글도 있고, 중국의 항전을 지원하고 있는 조선인과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감사를 표하고 격려하는 글도 있다. 또한 대적(對敵) 선전의 방법 등 실무적인 내용의 글도 있다. 셋째, 조선의용대의 노선에 관련된 글들도 적지 않게 실렸다. 이를 통해서 계림시기에도 초기와 후기에 노선상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목판화가 꾸준히 게재되었다. 목판화는 내용의 간결성과 선명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특히 계림에서는 항일운동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유명한 중국인 화가들의 목판화가 많이 실렸다.
조선의용대통신은 조선의용대의 전략 개발과 정리 및 전달이라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조선의용대의 당면 목표나 대외적 주장, 활동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홍보 수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