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成俔)의 『허백당집 虛白堂集』에 그 산은 동쪽으로 뻗어 동해를 임하여 삼척부(三陟府)가 있고, 3도(道)의 사람들이 산정에 신당을 짓고 신상을 만들어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산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제사를 마치고는 신사 앞에 소를 매어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가 3일 만에 와서 몰고 가는 습속이 있었다. 잠시 소를 두고 갈 때 뒤를 돌아보면 신의 벌을 받는다고 하여 금기를 지켰다고 하는데, 소를 두고 가는 풍속을 퇴우(退牛)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산신은 매년 사월 초파일에 마을에 내려왔다가 5월 단옷날에 산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이 신이 마을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마을사람들이 신기(神旗)를 만들어 읍의 서낭당에 모셔두고 그 앞에 제상을 차려놓고 빌고 정성을 드린다.
이러한 것을 미신으로 여긴 충학(沖學)이라는 중이 이 신사를 불살라 버렸다고 하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당시 영동의 관찰사였던 김치(金緻)가 태백산사를 헐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이 지방에서의 산신에 대한 주민의 숭배는 여전한데, 현존하는 민속으로서 강릉의 단오제가 대관령산신을 맞아 별신굿을 하고 보내는 과정에서 산신을 맞아 모시고 보내는 과정은 그러한 유습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태백산 천제단에서 매년 개천절에 단군을 기리는 천제가 복원되어 행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