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적 도시의 불량촌(불량주택 밀집지역)의 기원은 일제시대의 토막민촌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월남민 및 도시 이재민들의 주거 형태로서 판자촌이 확산되었다. 판자집은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미군이 진주할 때 가지고 온 라왕·미송 등의 목재 조각과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하여 바락크 집을 지은 것이다. 판자집은 1953년 서울의 경우 상자집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하꼬방이라는 별칭도 사용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9년까지 남한으로 이주한 귀환 동포 수는 일본에서 137만 9,000명, 만주 및 기타 등지에서 41만 5,000명,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 74만 명 등 총 253만 5,000명이다. 그 중 약 반 정도는 도시 지역에 정착하여 도시인구 증가를 주도했고, 이들 유입인구는 그들의 출신지에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 정착하였다. 만주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대부분 농촌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나, 유입인구의 가장 큰 구성 요인이었던 일본 귀환민은 대부분이 일본의 상업 및 공업지역 거주자들로 주로 대도시와 출신 도시인 지방도시에 정착하였다. 이들 귀환 동포의 다수는 이농민과 함께 하천변, 산비탈과 같은 도시 주변의 공지에 천막집, 움직, 토담집, 판자집을 짓고 거처를 확보하여 무허가 정착지를 형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울의 하꼬방촌이란 이름의 소위 해방촌이었다.
한국전쟁은 또 다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초래하였다. 1952년 말 남한의 피난민 수는 약 186만 명 정도로 대부분은 생활기반을 상실하고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여 대규모의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였다. 그 결과 어느 도시에서나 판자집, 천막집, 폐차, 선상(船上), 창고, 방공호, 동굴, 토막, 토굴 등의 무허가 불량주택이 대규모 발생해서 ‘판자촌’이라는 도시빈민 밀집거주지역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허가 정착지를 지칭하던 산동네, 달동네라는 표현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초기의 판자집에는 맨 마루바닥에 가마니를 깔았고, 나중에 점차 구들을 설치하였으며, 난방시설도 거의 없었고, 판자촌에는 변소시설이 제대로 없거나 여러 세대가 공동변소,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다. 1950년대 정부의 무허가 정착지 정책은 이주 대책 없이 철거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고, 이재민의 경우에만 빈민 구호 차원에서 시 외곽 공유지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부의 정책에 판자촌 주민들이 반발하고, 철거 지역에 다시 무허가 점포나 주택이 재건축되는 등 판자촌 철거의 효과가 거의 없게 되자, 서울시는 1958년 미아리 정착지 조성 사업을 하였다.
1961년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농현상으로 매년 50∼70만 명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고, 이들은 도시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이 없어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고 소득이 낮은 비공식 직업을 택하게 되어 집세가 상대적으로 낮은 빈민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 판자촌은 형성 당시에는 대부분 판자로 벽과 담을 만들고 초가와 루핑(roofing)으로 지붕을 이은 판자집들로 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의 새마을사업과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지붕은 기와와 슬레이트로, 벽과 담은 시멘트로 개량하여 현재는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1960년대부터 판자촌을 비롯한 도시빈민의 불량 주택에 대해 정부는 도심 외곽에 정책적으로 무허가 불량주거지를 조성한 뒤 양성화 정책을 통해 불법 점유를 사실상 합법화 시키는 방식으로 정착지 조성 이주사업을 실시했다. 즉 도심에 난립하던 도시빈민의 불량 주택을 제거하였고, 안정적인 직업이 없던 도시빈민을 도시 외곽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실시했단 것이다. 그 대표적 사업이 청계천변 복개공사와 세운상가 아파트 건립 등으로 발생한 철거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1969∼1971년 추진된 광주대단지사업이었다. 광주대단지에는 1968년부터 1971년 6월까지 23,692세대, 114,455명이 이주하였지만, 도시 부동산 개발을 위해 일자리, 생활 기반시설 등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이에 생계 대책이 막연하였던 주민들은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을 일으켰다.
1950년대말부터 1972년말까지 판자촌을 비롯한 무허가 정착지 주택 48,718동, 64,140가구 30여만 명을 시 외곽 98개 지구 930만 평에 정착시켰다. 당시 대규모 집단이주 정착지는 서울시 북부의 미아, 상계, 도봉, 쌍문, 수유지역과 서부의 홍은, 남가좌, 북가좌, 수색, 연희지역, 강남의 사당, 봉천, 신림, 시흥, 구로지역, 남동부의 가락, 거여, 마천지역 등이었다. 1973년 주택개량 재개발사업이 법제화된 이후 무허가 주택을 비롯한 불량 주택들의 발생이 현격하게 감소하였다.
판자촌은 1960∼1970년대 대표적인 도시 주거양식이었으며, 무허가 불량 주택단지였다. 판자촌에는 상하수도 및 오물처리시설 등의 미비로 보건 위생상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노후한 불량건물이 무질서하게 밀집되어 있어 화재 발생의 위험성이 큰 지역이었다.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생활 상태는 다른 도시민들에 비해 대체로 가구당 식구 수가 많은 데 반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계수단이 없기 때문에 낮은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각종 문화시설의 보급률도 낮은 편이고, 일상 소비행위는 인근 시장이나 가게에 의존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 때문에 판자촌은 일반적으로 가난한 지역 또는 도시영세민 거주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판자촌 주민들은 생활 상태와 형편이 비슷한 이웃과 협소한 공간에서 밀집하여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 접촉 기회가 많아 인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장점을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판자촌은 대부분이 관리가 소홀한 시공유지에 불법적으로 형성되었거나, 합법적이라도 영구 주택으로 이용할 수 없는 주택단지로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시기 하층민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