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공사중에 발견되어 1961년 3월 발굴, 조사되었다.
6개의 주거지와 고분 1기를 확인하였는데, 고분은 고구려시대의 고분과 유사하며 발굴조사 당시 심하게 파괴되어 그 현상은 알 수 없고 주거지만 발굴하였다.
주거지는 1기만 조사되었는데, 현재의 지표면에서 40㎝ 정도 아래 5∼10㎝ 정도의 검은 탄화층 밑에 주거지가 노출되었으며 남북 장축이 6.9m, 동서 너비 4.7m의 장방형이다.
출토된 유물은 첨저형토기·대패날·반월형석도·석촉 등이고, 주변에서 반월형석도 4점, 석부 2점, 석촉 1점, 성형석부, 기타 석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 주거지는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거석문화연구에 대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첨저형토기와 목이 달린 첨저형토기 등이 출토된 점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이 출토된 유적지로는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 황해남도 용연군 석교리, 평양시 승호구역 금탄리·신촌리·묘송리 등이 있다.
주거지를 통하여 선사인들의 취락형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완전한 지상건물과 함께 50∼60㎝ 이상 지하로 들어간 반움집형이 동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주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