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장산동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서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인물풍속도 · 사신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서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인물풍속도 · 사신도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개설

보통강을 마주보는 장산 줄기의 구릉지대에 2기의 벽화고분이 있다.

내용

제1호분은 봉토(封土)가 유실되고 묘실(墓室)의 천장부와 벽체(壁體)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원형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묘실을 화강암과 화강암 판석(板石)으로 구축하고 회를 곱게 바른 지상식으로서 연도(羨道)와 현실(玄室)로 구성된 단실분(單室墳)이다.

현실의 크기는 길이 3.1m, 너비 2.55m이다. 연도는 길이 3m, 너비 1.1m로 남벽의 중앙부에 설치되었으며, 축조재료는 현실과 같다.

관대(棺臺)는 현실 북쪽에 동서를 장축(長軸)으로 설치되었다. 바닥에는 높이 30㎝ 정도의 받침돌〔支石〕 4개를 놓고 그 위에 길이 245㎝, 너비 120㎝의 대형 판석을 올려놓았다. 판석과 받침돌에는 모두 석회를 발랐다.

관대의 서쪽과 북쪽 면은 묘실의 서벽·북벽과 맞붙었다. 동쪽에는 관대에 연접시켜 두께 15㎝의 화강암 판석 2매를 나란히 세워 격벽(隔壁)으로 이용함으로써 묘실 동벽과의 사이에 30㎝ 정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관대 바로 앞의 양쪽 끝부분에는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높이 15㎝, 지름 34㎝의 둥근 주춧돌이 2개 놓여 있었다.

주춧돌 바로 앞에는 석상(石床)을 설치하였다. 서쪽 석상은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관대와 높이가 같으며, 받침돌이 2개이다. 동쪽 석상은 정방형으로 한 면이 동벽과 연접되어 있으며 받침돌은 4개이고, 높이는 관대보다 낮게 되어 있다.

현실 북벽에서는 흑(黑)·황(黃)·자(紫)·주(朱)·청(靑)·녹(綠) 등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해 그린 벽화의 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벽면 중앙에 주인 부부로 보이는 두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 남녀시종들이 늘어서 있는 내용이다. 주인공의 인물도 바로 밑에는 용으로 보이는 그림도 있어서 보고자는 인물풍속도(人物風俗圖)와 사신도(四神圖)가 함께 그려진 전형적인 고구려의 벽화고분으로 파악하였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파괴되어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며, 철정(鐵釘), 철제고리,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제2호분은 제1호분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구조는 제1호분과 거의 같아서 화강암 석재를 사용해 지상에 현실과 연도를 구축하였다. 석회를 곱게 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으나 파괴가 심해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현실 내에 판석 등을 사용해 관대, 주춧돌, 석상을 설치한 것도 제1호분과 동일하다. 그러나 위치와 형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2호분의 관대는 길이 213㎝, 너비 140㎝의 판석을 장변(長邊)이 북벽과 연접하도록 해서 중앙부에 설치하여 동서 양벽과는 각각 15∼20㎝ 정도 떨어지도록 하였다. 관대의 양쪽 모서리 앞, 즉 현실의 중앙부 동서 양벽 가까이에는 각각 1개씩의 주춧돌이 있다. 그 중 동쪽 주춧돌 위에는 높이 44㎝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주춧돌의 바로 앞에는 똑같은 크기의 석상이 동서 양벽에 연접해 각각 1개씩 모두 2개가 설치되었다. 20㎝ 높이의 받침돌 4개 위에 길이 125㎝, 너비 60㎝, 두께 10㎝의 판석을 올려놓았다. 이와 같은 관대·주춧돌·돌기둥·석상 등 내부시설물에는 제1호분과 같이 석회를 곱게 발랐다.

연도는 남벽의 중앙에 설치되었다. 연도 입구는 폐쇄시설 외에 연도 중간, 즉 현실에서 60㎝ 정도 떨어진 곳에도 대형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함으로써 이중시설로 되어 있었다.

제1·2호분 모두 천장과 벽면의 상부가 파괴된 상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천장 가구형식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유물도 극히 빈약하고 제2호분의 경우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원인은 박장(薄葬)에 있다기보다는 파괴될 때 유출된 데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고분의 축조연대는 대체적으로 1호분의 내부구조와 벽화내용으로 보아 안악 3호분이 단순화된 형태, 즉 안악 3호분의 후행형식(後行型式)으로 파악되고 있어 4세기 말∼5세기 초엽으로 생각된다. 제1호분과 제2호분은 묘실의 구조형식이 거의 같기 때문에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고구려(高句麗)의 고고문물(考古文物)』(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장산동 제1호무덤 및 제2호무덤에 관하여」(주영헌, 『문화유산』 1962년 6기, 과학원출판사)
집필자
이형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