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조사 보고된 17∼18세기의 석회다짐 고분이다. 이 고분에서는 당시의 의복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합장분묘로서 1638년(인조 16)에 출생해 원주목사를 지내다가 1718년(숙종 44)에 죽은 이창령(李昌齡)과 1641년에 출생해 1714년에 죽은 이창령의 부인 이씨(李氏)의 분묘이다.
출토유물은 견직류의 남자 바지 1점, 작은 창옷 1 점, 큰 창옷 3점, 도포 2점, 여자 겹저고리 5점, 여자 누비저고리 1점, 여자 솜저고리 2점, 적삼 1점, 홑치마 1점, 겹치마 2점, 솜치마 3점, 여자 바지 1점, 장옷 1점, 원삼 1점, 당의 1점, 머리수건 1점, 천금 1점, 지금 1점 등 30여 점이다.
특히, 여자 의복은 양단·모본단(模本緞)·비단·명주 등으로 이루어졌고, 문양은 포도문·모란문·잔꽃문·봉황문·화문·운문 등으로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남자 의복은 얇은 견직류와 명주로 되어 있다. 이 곳에서 나온 의상들은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고 부분구조와 제작수법, 옷의 재질상에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유물들은 17∼18세기경의 의상을 해명하고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 초기의 옷과 기본형태가 달라진 것은 없으나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의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원산리에서 청자요지 5기가 발견되어 주목되는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순화삼년명(淳化三年銘, 992) 청자가 출토되어 고려청자 발생시기에 대한 규명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