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슬은 왕의 면복(冕服)의 곤복(袞服), 원유관포(遠遊冠袍)의 강사포(降紗袍), 벼슬아치의 조복(朝服)·제복(祭服)과 왕비의 적의(翟衣)에 딸린 것이다. 폐슬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복 위에는 이 폐슬을 착용하였으며, 그 재료는 처음에는 가죽을 사용하였고, 그 뒤 포백(布帛)으로 바뀌었다.
폐슬은 면복의 착용과 함께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폐슬을 보면 훈색(纁色 : 분홍색)의 증(繒 :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같은 색의 옷감으로 위·아래에 선을 둘렀는데 위는 비(紕), 아래는 준(純)이라 한다. 준(純) 안쪽에 오색선조(五色線條)로 된 순(紃)을 둘렀다.
그리고 그 안 양편에는 위에서 5치 밑으로 내려 차례로 조(藻)·분미(粉米)·보(黼)·불(黻)의 4장문을 수놓고 있다. 비(紕) 위의 가운데에 옷깃 같은 목이 있고 목 양옆에 옥구(玉鉤) 1개씩이 달려 있다. 1897년에 정한 12장복의 폐슬을 보면 다른 것은 같되 훈색 나(羅)로 만들고 위에 용 1개, 아래에 화 3개의 장문을 수놓았다.
또한, 백관복의 폐슬을 보면 왕의 폐슬과 형태는 같되 적색 초(綃)로 만들었다. 같은 색과 같은 감의 비와 준이 있었고 준 안쪽에 백색선조(白色線條)를 둘렀다. 그리고 이에는 따로 문식(紋飾)이 없었다.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조복의 적초의(赤綃衣)와 제복의 청초의(靑綃衣) 앞에는 각기 같은 색의 소형 폐슬 모양의 것이 달리고 폐슬은 없어졌다.
이것을 속칭 눈물받이라 하였다. 왕비의 폐슬을 보면, 조선 후기의 대홍색 적의의 폐슬은 대홍색으로 왕의 것과 같되 그 안에 무늬가 없는 것이었다. 1897년에 제정된 적의 제도에서 황후의 폐슬은 옷 빛깔과 같은 심청색(深靑色)에 적(翟)을 3등(等)으로 수놓고 그 사이에 소륜화(小輪花) 넷을 수놓는다.
그리고 추색(緅色)으로 깃을 하고 금직(金織) 운룡문단(雲龍紋緞)으로 가선을 두르며 저사사라(紵絲紗羅)를 형편에 따라서 쓴다고 되어 있다. 한편, 영친왕비의 폐슬이 적의와 함께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데 무늬에 있어서만 황후의 것과 차등이 있고 나머지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