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행 ()

한문학
작품
조선 중기에 이이(李珥)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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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이이(李珥)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시.
구성 및 형식

『율곡전서』「습유(拾遺)」 권1에 실려 있다. 이이는 1555년 19세에 금강산을 돌아보고 600구(句), 3000자(字)의 시로 읊었는데, 본래의 제목은 없다. 시를 짓게 된 동기를 “내가 풍악을 유람하면서 게을러 시를 짓지 않았다. 올라가 구경을 이미 마친 뒤에 이에 들은 바와 본 바를 주워 모아 삼천 자를 이루었지만 감히 시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지나고 겪은 것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말이 간혹 속되고 촌스러우며 운자가 간혹 두 번 놓기도 했으니 보는 이들은 비웃지 말라.”라고 하여 설명하여 제목을 대신하고 있다. 흔히 ‘풍악행’이라 불린다. 노정에 따라 곳곳에 주를 달아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내용

「풍악행」서두에서는 천지창조의 오묘신기한 조화경(造化境)을 서술하면서 금강산에서 느낀 감정을 전개하였다. 작자 이이는 금강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서 단발령 위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본다. 일만 이천 봉의 기묘한 전경이 눈 안에 들어오면서 자연계가 주는 황홀한 맛을 감탄으로 받아들인다.

장안사(長安寺)가 화재를 당하여 다시 범종루(梵鐘樓)를 짓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유점사(楡岾寺)에 다다라 그곳의 전경을 소상하게 그려 놓았다. 수 많은 암자들의 각색의 모양들이 모두 절경 속에 놓여 있음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 밖에 표훈사(表訓寺)·정양사(正陽寺) 등의 경치에도 진정으로 반해버렸음을 나타내 보인다.

이이는 자신의 풍악행에서 불사(佛寺)와 암자 찾기를 즐겨하였다고 말하였다. 작자의 학문적 수련에도 산행(山行)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듯 하다. 그의 여행 내지 유람의 자세는 풍류·소일의 지경을 벗어나 자못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보통의 사대부들은 여행안내를 산사의 승려들을 시키면서도 그들을 천대하거나 하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런데 작자는 불사와 암자에서 쉬는 동안 전혀 승려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비판하거나 얕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승려들의 행위를 고상하고 신성시한 면을 나타낸다. 작자가 외산(外山)의 남초암(南草庵)에서 만난 승려를 신선으로 부르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한 점을 알 수 있다. 끝부분에 산신령이 여행한 내용을 적어달라는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여행의 시말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풍악행」은 우리 나라 여행기록을 장편고시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이함을 찾을 수 있다. 산문적인 내용을 어떻게 시로서 적절히 표현하였는가에 문학적 관심을 끈다.

참고문헌

『율곡전서(栗谷全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8)
「여행자 문학에 관한 고찰」(최철, 『눈뫼허웅박사환갑기념논문집』,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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