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어를 잘 하였다. 향통사(鄕通事)로서 1595년(선조 28)부터 1607년(선조 40)까지 거의 해마다 8차에 걸쳐 평안도 만포 등지에서 북방 오랑캐와의 통교 혹은 선유(宣諭), 건주위 등의 정황 탐문, 향도(香徒)로서의 임무를 띠고 왕래하였다.
이같은 그의 공에 대한 논상으로 1607년에 수문장(守門將)을 제수하고, 그의 처가 신공납부에 어려움을 겪자 면역첩(免役帖)을 요청하여 얻기도 하였다. 아울러 전용(戰用)으로써 장편전(長片箭)과 궁검(弓劍)도 제급받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에는 노추(奴酋)가 배를 건조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그들의 소굴을 정탐하러 들어가기도 하였으며, 활동 중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노이(奴夷)를 접대한 공으로 논상하여 사과(司果)로 삼았다.
1617년에는 여진훈도로서 오랑캐들이 귀순하였을 경우에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탐문 역할도 하였다. 1619년 명과 후금의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참전한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 등의 대열에 향도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주로 6진의 번호(藩胡)들의 내응을 꾀하기 위해 격문을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거나 국서를 전달하고 명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후금과의 교통로를 새로 개설하는 등 화친의 대임을 맡아 결국 후금에의 항복을 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