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학교교육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학생의 기원은 학교교육의 역사와 그 연혁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학교교육은 멀리 고조선까지 소급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 서설(序說)로 나타나는 학교교육의 기원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태학(太學)의 설립에서부터 보고 있다.
따라서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학생은 고구려 태학의 수학생에서부터 연혁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 평양천도 뒤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경당(扃堂)도 주목할만한 교육기관으로 평가될 수 있다.
고구려와 거의 같은 시기의 백제는 학교설립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오경박사(五經博士)·예박사(禮博士) 등의 교육직관(敎育職官)이 보인다.
또 육좌평(六佐平) 중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의례(儀禮)를 관장하는 오늘날 교육부장관의 성격을 가지는 직관이라는 점, 또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한학을 전한 것 등으로 보아 학교교육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백제에도 학생이 존립하였다는 논증이 가능할 수 있게 된다.
신라는 통일 이전 고구려의 태학과 같은 형식교육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랑도(花郎徒)라는 청소년집단이 있어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실천강령으로 하면서, 유교적 덕목과 신체단련·정서함양 등을 통하여 국가관을 배양하였다. 따라서 신라시대 화랑도는 교육집단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을 바로 신라의 학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국학(國學)이 대학교육으로 정립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 태학생(太學生)과 비슷한 성격의 국학생(國學生)이라는 학생군(學生群)이 등장하게 된다.
이 밖에도 산학(算學)·의학(醫學)·천문학(天文學)·과학(科學)을 전공하는 학생군도 등장하였다. 고려시대는 당송제(唐宋制)에 입각한 학교교육이 정착되었다.
대학교육으로서 국자감(國子監), 중등교육으로서 학당(學堂)이 건립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을 국자감생도·학당생도로 분류하였다.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지방교육기관으로 보편화되고, 이들 학생들은 교생(校生)이라고 불렀다.
이와 병행하여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비롯한 십이도(十二徒)의 사학(私學)이 당시 사회의 귀족적 성향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여기서는 도(徒)라는 학생군이 등장한다.
조선사회는 고려의 학교교육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성균관(成均館)이 최고의 학부로 정착되었고, 학당과 지방의 향교가 중등교육의 성격으로 정립되었다. 중종 이후 서원(書院)이 교육기능을 가지는 새로운 학교로 등장하면서 서원의 학생들을 원생(院生)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 이후 주요한 학생군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사회의 학생은 성균관생도(일명 館生)·학당생도·향교생도(일명 校生)·서원생도(일명 院生)로 분화되게 된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서당(書堂)이라는 사설교육기관이 나타났으며,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전국에 확산됨에 따라 초등교육의 보편적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이 곳의 학생, 즉 서당생도들은 유학의 초입자로 이후 향교와 학당에 진출할 수 있는 예비학생군으로 의의를 가지게 된다.
19세기 서구문물의 전래와 더불어 서구식 학교교육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었는데, 초기의 학교로서 주목되는 것은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다.
이후 이화학당(梨花學堂)·경신학교(儆新學校) 등이 나타나는데, 이들 학교는 주로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이었다. 전통시대의 학교교육은 신분에 따라 철저한 계급의식에 입각해서 학생을 선발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들 학교의 학생들은 신분과 계급적 속박에서 탈피하여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문호를 개방하였다는 점과, 전통적 교육과정인 전문적 유학교육을 부정하고, 서구의 교육과정에 입각한 학문적 배열이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학교의 설립시기를 우리 나라 교육근대화의 태동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1894년 갑오경장은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 진통기라는 의의가 부여되는 주목할만한 시기이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근대교육을 지향하기 위한 국가적 의지가 학무아문(學務衙門)이라는 문교행정기관으로 나타났다.
또 학무아문은 그 내부 구조로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어학교 및 전문학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전문학무국과 소학교·사범학교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는 보통학무국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서구교육에 입각하여 교육체제를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대학으로 연결하고자 한 국가적 의도의 반영으로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1895년에 공포된 고종의 <교육조서 敎育詔書>는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지(知)·덕(德)·체(體)라는 근대이념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1895년 4월 <한성사범학교관제>가 공포되고, 이어 <외국어학교관제>·<소학교령> 등이 공포되었으며, 1899년 4월에는 <중학교관제> 등이 제정되어, 이들 관제에 입각한 학교가 새로운 학교전통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한국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로써 학생의 신분도 재래의 폐쇄적 대상에서 벗어나 전국민을 대상으로 개방되었다. 또 이들 학생들은 재학하는 학교의 성격에 따라 소학생·중학생, 또는 외국어학생·사범학생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학생개념으로 보편화되었다.
이후 1949년 12월 <교육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기간학제가 정립되기 시작하여 1951년 현재와 같은 6·3·3·4제의 학제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 등의 학생개념도 정립되었다.
이들 학생들의 사회적 신분은 한국사의 정치사회성의 특수성과 연결하여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교육변천사는 크게 전통교육과 근대적 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갑오경장 이전은 전통적 교육기로, 그 이후는 근대교육기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갑오경장 이전에도 선교계 또는 민족선각자에 의한 근대화 교육이념이 실재적(實在的) 학교교육의 설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차원에서, 또 전국적인 교육개혁이라는 대단원에서 교육체제가 개편된 것은 갑오경장 이후로 볼 수 있다. 갑오경장은 학생에 대한 재래의 전통적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재래의 전통적 학교교육과 근대학교교육은 학생들에 대한 재래의 인식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인식에서도 일대변화를 수반하였다.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학생신분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전통적 교육에서는 이들 학생들이 관계(官界)에 진출할 수 있는 신분계층이었다. 이에 반하여 근대적 학교에서는 모든 계층에 문호를 개방하여 누구라도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둘째로,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주목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학생들이 지향하는 교육목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 교육과 근대적 교육은 인격연마에 의한 인간완성이라는 면에서는 그 목표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인간완성의 가치관이 전통적 교육에서는 과거(科擧)로 관계에 진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교육에서는 개인의 능력에 의한 다양한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나타난 학교를 규명하면서 이들 학생들의 성향을 분석하면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수림왕 2년조에 보면, ‘입태학교육자제(立太學敎育子弟)’라는 기사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학교기사로 등장하였다.
당시 학생은 위의 기록에서 막연히 ‘교육자제’라 하여 그들 신분상의 위계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당시 사회는 이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분화가 나타나 사회질서로서 정착되어 있었음을 전제할 때, 이들은 지배체제와 연결되는 신분층의 자제로 파악할 수 있다.
또 고구려 교육상(敎育相)으로 주목되는 것은 ≪당서 唐書≫ 고려전(高麗傳)에 전하는 경당이다. 이에 의하면 ‘시양지가 미혼자제(廝養之家未婚子弟)’ 등의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일반평민들의 미혼자제가 이들 학교의 학생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평민의 개념은 지배층과 연결될 수 있는 계층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일반평민과는 그 개념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화랑도는 비록 형식교육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교육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인용된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花郎世紀>에는 “현좌충신(賢佐忠臣)도 이에 의하여 천거되고, 양장용졸(良將勇卒)도 이로 인하여 생겼다.”고 평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학생들은 위로는 현좌충신에 이를 수 있는 신분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용졸에 이르는 신분층까지 각계각층의 신분층이 망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여기에서 현좌충신 및 장(將)에 이를 수 있는 계층은 신분층의 상부구조인 진골(眞骨) 및 6두품으로 설정할 수 있으며, 용졸은 지배층에 이를 수 없는 신분적 계층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화랑도집단은 위로는 진골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그 문호가 개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국학(國學)은 유교적 교육기관으로 전문화되면서 그 문호가 극히 폐쇄적인 것으로 제한되었다.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삼국사기≫ 직관(職官) 국학조에 “범학생 위자대사이하 무위자 연자십오 지삼십 개충지(凡學生位自大舍已下無爲者年自十五至三十皆充之).”라 하여, 무위자에서부터 대사 이하의 관직을 가지는 자로서 15세 이상 30세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대나마(大奈麻) 또는 나마의 관위(官位)를 얻는데, 신라 골품제하의 신분제를 보면, 4두품은 12관등 대사에서 그들의 관로가 차단당하고 있다.
그리고 5두품은 10관등 대나마에서 차단당하고 있는 한계선에 비추어볼 때, 실질적으로 국학에서 학생으로서 수학할 수 있는 대상은 주로 6두품계층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수업연한은 9년이었으며, 만약에 노둔하여 교화시킬 수 없는 자는 중도에서 출학시켰으며, 9년이 지나더라도 가능성이 있는 자는 계속 학업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는 귀족사회라는 일반적 통념이 말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신분적 질서에 의한 교육제도로 학교교육이 편제되고 있었다.
특히 <학식 學式>에 보이는 국자감의 입학자격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국자감 학생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과거응시자격을 가진 대상자로서 국자감시를 거쳐 국자감에 입학한 진사출신의 학생이고, 또 하나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음(蔭)에 의하여 입학한 문음출신의학생이다.
<학식>의 내용에 보이는 국자감입학자격은 문음자제(門蔭子弟)를 우대하는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후 의종대에 승보시(陞補試)가 나타나 생원출신의 학생도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예종의 교육개혁에 의하여 나타난 국학 칠재(七齋)의 학생이다.
이 중 강예재(講藝齋)의 무학생(武學生)들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장재교육(將才敎育)을 위한 노력을 보였다는 데 의의가 있으며, 이들 무학생들은 이후 무거시(武擧試)를 거쳐 관로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국자감 학생들은 일단 입학과 더불어 내사생(內舍生)으로 편제되었다가 이후 그들의 교육성과에 의하여 상사생(上舍生)으로 승차(陞次)되었다. 일반적으로 수업연한은 예종 5년의 판문(判文)에 국자감 재학 3년이면 과거응시자격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아, 3년을 일차 수업연한으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종 때의 판문에 국자감 재학 9년 동안에 학(學)을 성취하지 못한 자는 출학시킬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신라의 국학과 마찬가지로 최종수업연한은 9년으로 하였던 것 같다.
고려시대의 지방학교, 즉 향교의 경우는 주로 지방의 장리(長吏) 이상의 계층에게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은 이후 향공(鄕貢) 진사의 자격을 취득한 뒤,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구하였다.
고려 후기 학당교육은 지방의 향교와 같은 중등교육의 성격을 가지며, 이들은 국자감시를 거쳐 국자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기도 하였다.
또 일단 입사(入仕) 과정을 거친 뒤 과거에 응시하기도 하였다. 사학교육으로 주목되는 십이도의 학생들은 주로 당시 사회의 귀족화성향과 결합하여 귀족자제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조선시대는 최고학부로서 고려 후기의 성균관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학생으로서의 입학자격은 전조(前朝)에 비하여 많은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학생으로서의 자격요건을 살펴보면, ① 과거의 생원과·진사과에 합격한 자, ② 15세 이상의 사부학당 학생으로서 ≪소학≫과 사서(四書) 일경에 통한 자, ③ 일찍이 문과나 생원·진사 또는 향한성시(鄕漢城試)에 합격한 자, ④ 조사(朝士)로서 입학을 원하는 자, ⑤ 음서자(蔭敍子)로서 ≪소학≫에 통하는 자, ⑥ 경향유학(京鄕幼學) 우수자로 하였다.
이들은 모두 성균관학생으로 호칭되고 있지만, 학교에서 수업하는 데는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생원·진사 출신의 정규학생은 상재(上齋)에 거(居)하는 데 반하여, 4학(四學)에서 올라온 학생은 승학(升學)이라 하여 하재(下齋)에 거하였다.
또한 1517년(중종 12)에는 경향의 유학(幼學)으로 우수한 자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는 명목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동서 하재에 거하도록 하였다. 정조 때에는 서출의 생원·진사가 남헌(南軒)에 들어 이를 남반(南班)이라 불렀다.
이들은 다 같은 성균관학생이었지만 상호간의 구별은 매우 엄격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의 편제로 나타났던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의 학생들은 소관의 행정관부로 이관되어 그 곳에서 전문교육을 받았으며, 성균관은 유학교육기관으로 그 성격이 전문화되었다.
학당교육과 지방의 향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생진과에 응시하거나 승학생(陞學生) 또는 기재생으로 성균관에 승보(陞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초등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서당은 그 학업의 성취도에 따라 8세 이상이 되면 학당이나 향교에 진학하여 중등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서구문물의 전래에 따라 새로운 교육전통으로 부각된 근대학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혁신적인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통적 신분층에게만 개방되었던 학생자격의 문호가 모든 계층에게 확대되어, 모든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학교에 진학하여 학생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화학당의 경우 초기학생들은 부모 없는 고아들, 가세가 빈한한 서민계층의 어린이들 및 결혼생활에서 실패한 여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배재학당·경신학교의 경우도 전통적 신분층이 아닌 일반서민의 자제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학생들은 전통적 교육제도 하에서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특히 여성도 학생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은 이때부터 나타난 것이며, 이것은 전통적 학교교육에서는 볼 수 없는 큰 혁신이었다.
이와 같은 추세를 거쳐 1894년 갑오경장이 수반되는 과정에서 교육개혁은 전통적 교육을 부정하고 새로운 좌표로서 신분질서를 타개하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정부차원에서 건립된 한성사범학교는 근대교육의 기수를 양성한다는 관점에서, 이들 학교의 학생들은 교사로서의 자질함양을 목표로 하였다. 1895년 7월에 공포된 <소학교령>은 만 8세부터 15세에 이르는 모든 아동들에게 의무적으로 취학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의무교육의 시초로 교육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학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8세 이상의 아동들은 학생이 되는 것이 그들의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능력에 의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부터 학생은 특권신분층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누구나 학생이 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사의 흐름에서 주목되는 것은 학생들의 활동이다. 이들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자치기구를 만들어 그들의 활동준칙을 결정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국가에 그들의 의견을 정견(政見)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살펴보면 그 대강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은 자치기구로 재사(齋舍)를 조직하였으며, 간부급으로 장의(掌議)·색장(色掌)·조사(曹司) 등을 선출하고 있다.
회의의 진행과정은 장의가 안건을 제의하면 수복(守僕)이 그것을 색장에게 품하여, 색장은 다시 당장(堂長)에게 품하여, 당장은 이를 다시 제생(諸生)에게 포고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와 같이 학생들은 그들 활동준칙에 대한 지침을 스스로 정하고 그에 따른 충실한 학내생활을 지향하면서, 더 나아가 그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국가시책의 부당성에도 용감하게 그들의 의사를 개진하여 그 시정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경우 예종 때 국학생 고효충(高孝沖)은 예종의 무절제한 향락에 <감이녀 感二女>라는 풍자시를 지어 간(諫)하였다.
인종 때 국학생들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지양하고 ‘칭제건원 금국정벌(稱帝建元金國征伐)’ 등의 자주노선을 건의하였으며, 인종 때 국학폐지론에 대하여 국학생들은 강력한 그들의 의지로 이를 철회시키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여말선초의 국난기에 고려의 운명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한 두문동(杜門洞) 72현도 학교교육과 연계된 학생이었거나 또는 학교를 마친 학사(學士)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학생들은 부당과 부정에 대하여 용감하게 그들의 의사를 개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활동을 자치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전기한 부당·부정의 사례가 나타나면 유소(儒疏) 또는 권당(捲堂)·공관(空館)이라는 행동으로 그들 요구의 관철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
유소란 학생들의 집약된 의견을 상소로 올리는 것이며, 권당이란 그들의 일차적 행동인 유소가 철회되는 경우 이를 위한 행동투쟁으로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것, 즉 단식투쟁에 해당한다.
공관이란 관(館)을 비우는 것, 즉 동맹휴학과 비교할 수 있다. 학생들이 만약 공관의 사태에 이르면 주변의 상가는 이에 호응하여 또한 철시하였으니, 학생행동에 대한 당시 사회의 여망을 알 수 있다.
국난에 즈음한 학생들의 활동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일제 하에서 학생들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그들의 소임으로 알아 이를 위한 행동실천인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동경유학생들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이 주목되며, 이어 나타난 3·1운동도 그 실제에 있어서는 학생들이 주체세력이었다.
3·1운동의 과정에서 민족의 독립을 절규하면서 숨져간 유관순(柳寬順)도 당시 16세의 이화학당 학생이었으며, 1926년 6·10만세운동의 주역도 역시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 의한 투쟁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에서 더욱 빛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독립을 희구한 민족의 염원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후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국 각지의 학생운동으로 확대,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성격은 당시 맹휴중앙본부에서 발표한 문서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
“400의용사여! 우리의 전투는 당분간 전개해 나간다. 이 투쟁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전라남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조선·전 세계에 전개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전 조선의 수백만 학생대중들은 우리의 성공을 갈망하고 있다.
용사들이여!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의 승리는 맹휴 중의 우리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피압박 백의민족 해방의 초보가 되고 소생의 원천이다. 용감한 투사여! 우리들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싸워라!”
이와 같은 학생들의 정신은 일제통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이러한 학생들의 정신은 민족의 처지를 대변하면서 쉬지 않고 계승되었다.
즉,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민족의 염원이 학생들의 시위활동으로 나타났고, 1950년 북한의 침입에 대한 국권수호를 위하여 이들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1960년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족적 운동도 선도하였으니, 이것이 4·19혁명으로 나타난 학생운동이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1970·1980년대에도 계속되어, 주체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신조로 한 각종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때로 일부 과격한 학생들의 시위 등으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학생들의 합법적인 사회참여활동은 국민을 대표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세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