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자연맹 ()

근대사
단체
1927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범민족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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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7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범민족운동단체.
개설

1927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상해 마랑로(馬浪路 : 지금은 馬當路 306-4)로 옮긴 뒤, 이동녕(李東寧)이 국무령 김구(金九)에게 범민족세력 결집을 위한 외곽단체 결성을 권유하면서 조직되었다.

설립목적

강령을 살펴보면, 첫째 범민족세력과 단체의 통합을 위해 이미 국내에 신간회(新幹會)를 조직되었으니 국내외 광복투쟁을 유기적으로 기동성을 가지며, 둘째 우리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대한족은 대동단결함을 원칙으로 하여 연맹 산하에 뭉칠 것, 셋째 기회주의의 배격과 민족적 각성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의 행복과 민생안정을 도모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실천요강으로, 첫째 좌우익의 소모적인 정쟁(政爭)을 지양하고 공동의 적 일제를 타도, 섬멸하는 데 함께 전진만을 거듭할 것, 둘째 장개석(蔣介石)중국정부(국민당)와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맺어 물심양면으로의 지원을 유발하게 할 것,

셋째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해서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 지원단체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소수의 단체를 설득해서 민족사적 의미를 호소, 우익단체로 만들 것, 넷째 상해 프랑스조계와 공동조계 안에 있는 우리 동포의 기강확립을 위해 힘쓰며, 특히 밀정·변절자·내통자·정보유출제공자는 지위의 고하를 불문하고 처단할 것 등이다.

연원 및 변천

이와 같은 강령과 실천요강이 즉각 실천으로 옮겨져 광복사업을 각 부서별로 분담, 처리하였으며 연맹 부서도 정하였다. 이동녕·김구가 공동으로 대표를 맡았으며 부대표로 이시영(李始榮), 총무에 조완구(趙琬九), 섭외에 조소앙(趙素昻), 조직에 김원봉(金元鳳), 국내담당에 이유필(李裕弼), 미주담당에 이승만(李承晩), 구주담당에 황기환(黃玘煥), 만주담당에 윤기섭(尹琦燮), 중국담당에 유자명(柳子明) 등이 선출되었다.

조직 구성을 보면, 좌우익을 총망라한 통합적인 면을 띠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단체를 상해임시정부 산하로 모을 정책을 토론하고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실천단계에서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의견조정이 쉽지 않아 결국은 결렬되고 말았다. 단지 임시정부가 혁명투쟁에 필요한 투사를 양성해야 하며,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물질적·군사적 원조를 차관형식으로 요청할 것이라는 등 당면한 다섯 가지 광복 정책만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 산하로의 단체 흡수는 시도단계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단지 각 단체 대표는 임시정부 국무령 등이 소집하면 언제라도 응하여 회의에 참석·협의할 것을 결의하는 선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윤봉길(尹奉吉)의사 의거 이후 연맹은 자연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임정(臨政)과 이동녕연구(李東寧硏究)』(이현희, 일주각, 1989)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원호회, 1956)
『朝鮮獨立運動』Ⅰ·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 東文社書店, 1946)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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