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광보(光甫). 한수성(韓守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부(韓頫)이고, 아버지는 한찬남(韓纘男)이다.
1613년(광해군 5, 계축) 5월에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이 올린 김제남의 역모와 관련하여 영창대군과 모후도 아울러 토죄할 것을 청하는 소에 연명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인 한오(韓晤)와 한희(韓暿)도 참여하였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고 과거 응시자격도 박탈되었다.
1615년 4월에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그의 나이 18세였다. 그의 합격에 대해 나이가 너무 어려서 책을 읽지 못했는데도 좋은 성적으로 급제할 수 있었던 것은 흉당의 자제이면서 시론을 좇았기 때문이라는 비난과 함께 답안지에 자표(字標)를 하였다는 설도 제기되어 논란을 빚었다.
같은 해 12월에 분관(分館)이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때 권지성균학유에 제수되었다. 이후 검열, 홍문관정자, 대교·겸설서·봉교·정언 등을 역임하고, 조봉대부 행예문관검열로서 『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전적·부교리·교리·부수찬·헌납, 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여 거의 삼사의 직만 맡고 있으면서 당여(黨餘)의 언론 창구 역할을 하며 폐모론(廢母論)을 적극 주장하였다. 외직으로는 1620년에 인천현감을 잠시 지냈으나 중병으로 관아를 폐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에 아버지 한찬남의 죄에 대한 연좌율로 참형에 처해졌으니,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