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언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수복경성2등공신에 책록된 공신.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서북면도순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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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후기 수복경성2등공신에 책록된 공신.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청주(淸州). 공민왕 때에 군기감을 역임했으며,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서울이 함락당하자 이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 논공행상 때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71년 밀직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4년 명나라가 북원정벌을 위해 사신 임밀(林密)을 보내 말 2,000필을 요구하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말을 운송하기 위해 제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주의 말을 관리하던 몽골의 목자(牧子) 합적(哈赤, 카치)·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샤오쿠투부카)·관음보(觀音保) 등이 거부하여 겨우 300필만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책임을 물어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고, 최영(崔瑩)을 보내 제주를 토멸하게 하였다.

이듬해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하자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양광도부원수 겸 도순문사(楊廣道副元帥兼都巡問使)가 되어 이들과 싸웠으나 경양현(慶陽縣: 충청남도 천안)에서 패하였다. 이 때문에 탄핵되어 수졸(戍卒)로 편배(編配)하였다. 1376년 안주부원수(安州副元帥)가 되고, 1377년(우왕 3)에는 판밀직사로서 안주원수가 되었다.

이듬해 문하평리로서 양광도조전원수(楊廣道助戰元帥)가 되어 옥주(沃州)·진동(珍同)·회덕(懷德)·청산(靑山)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이어 정지(鄭地)와 더불어 영광·광주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옥과현까지 추격, 미라사(彌羅寺)에서 포위, 공격해 크게 승리하였다.

1379년에도 평리상의(評理商議)로서 양광도조전원수가 되어 왜구의 기병 700명과 보병 2,000여 명이 진주(晉州)를 노략질하자,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전투하여 13명의 목을 베었다.

1382년 서북면도체찰사 겸 안주도상원수(西北面都體察使兼安州道上元帥)가 되어 정료위(定遼衛) 군사에 대비했으며, 이 해에 단양·안동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크게 격파하였다.

다음 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상원수가 되어 명나라의 북변 침입에 대비했으며, 그 해 11월 왜구가 청풍군에 침입하자 서북면도순찰사가 되어 금곡촌(金谷村)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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