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일지(一之). 할아버지는 한협(韓協)이고, 아버지는 한수기(韓壽琦)이다. 큰아버지인 한치량(韓致良)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9년 허견(許堅)이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첩을 구타한 사건과 차옥(次玉)의 옥사 등을 남구만(南九萬)이 소를 올려 거론하자, 전적(典籍)으로 있던 그도 상소하여 사건 처리 과정의 의혹과 관련자를 비난하였다.
이에 도승지 민종도(閔宗道)가 기망죄로 탄핵하여 곧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짓으로 죄를 뒤집어 쓴 것이 밝혀져 서용의 명이 있었다. 이후 수 년 동안 대간직에 머물러 지평을 거쳐 장령(掌令)·헌납(獻納)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그러나 논핵의 잘못으로 체직되거나 지방직으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이사명(李師命)과 홍치상(洪致祥)의 무옥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정배되었으며, 1694년 이르러서야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