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봉서(鳳瑞)·봉용(鳳用)·봉룡(鳳龍).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07년 8월 의병장 김규환(金奎煥)을 만나 감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기의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둔 유격전의 명수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로 알려질 정도로 총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진천(鎭川) 문배리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島崎善治] 등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米院)·진천·괴산·횡성·장호원 등에 출몰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上海)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출옥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청주에서 시위하여 다시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