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의주의 별장(別將)이었는데, 당시 관리들의 탐학과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기화로 1219년(고종 6) 낭장(郎將) 다지(多智)와 함께 의주수(義州守) 이체(李棣),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원수(元帥)를 자칭하며 감창사(監倉使)와 대관(臺官)을 설치하고 나라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므로 가주(嘉州)·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등 북계(北界)지역의 여러 성이 이에 향응하거나 또는 함락되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한 정부가 삼군(三軍)을 편성하여 진압을 개시하자 청천강을 경계로 그 이북의 땅을 들어 동진(東眞)에 투항, 금(金)의 원수 우가하(亏哥下)를 끌어들여 의주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박주에 주둔하여 연합전선을 펼쳤다.
이에 중군(中軍)의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파견된 김군수(金君綬)가 선무사(宣撫使) 이공로(李公老)와 상의, 우가하를 편지로 설유(說諭)함으로써, 결국 우가하의 계교에 빠져 1220년 다지·윤대명(尹大明)·한존열(韓存烈) 등 당여(黨與)와 함께 살해되고 난은 5개월 만에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