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선(子善), 호는 도곡(陶谷). 한사신(韓士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석(韓碩)이고, 아버지는 교리 한지원(韓知源)이며, 어머니는 윤박(尹璞)의 딸이다.
어려서 문장에 힘썼으며, 고시(古詩)로 이름이 높았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80년에 알성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596년에는 중시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삼척부사로 나갔으나 곧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초기에 서천군수로 있을 때 도망갔다 하여 의금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나라 제독의 접대에 차출되었음이 밝혀져 혐의를 벗었다. 1599년 해주목사가 되었으나 간관으로부터 재주가 용렬하고 치적이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문과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사관으로부터 그의 사람됨이 비루하고 천한 행동으로 사류에게 버림을 받았으므로 시관이 될 수 없다는 사평(史評)을 듣기도 하였다.
이듬해 정주목사를 거쳐 영흥부사가 되었으나, 70세 이상의 부모를 둔 수령은 300리 밖에 임명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파직되었다.
1605년 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에 예물로 가져간 만화방석(滿花方席)이 습기에 젖어 변색되게 하였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여러 가지 물의를 빚어서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로서 경연특진관에 선발되었으나 사간원으로부터 평소에 명망이 낮다 하여 제외시킬 것을 요청받아 제외되었다.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다는 사관의 평을 여러 차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