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사기(韓謝奇)의 아들이다.
1310년(충선왕 2) 우대언(右代言),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가 여러가지로 왕을 참소하였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찬성사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中贊)을 역임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우정승에 이르렀다. 한어(漢語)와 몽고어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신중하고 기량(器量)이 있었다고 한다.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