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여경(女敬), 호는 석초(石樵). 경상북도 문경 출신. 1906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의병을 소집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원주·단양·제천·갈평·안동·내성·재산,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청풍작산전투(淸風鵲山戰鬪)에서 의병이 패하고 대장인 이강년이 순국함에 따라 의병진이 흩어지자 1909년 1월, 이토[伊藤博文]를 도륙(屠戮)하고자 이강년의 장남인 이승재(李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모았다. 이어 이기하(李起夏)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 몰래 경성에 들어가 거사를 진행하던 중 비밀이 폭로되어 피신하다, 예천군 용궁(龍宮)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 등과 거사를 모의하고 이듬해 4월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및 흥업단(興業團)과 제휴하였다. 군정서로부터 군자금 모집·사서(事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상북도 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뒤 1922년 11월 18일 이응수·이대기(李大基) 등과 비밀사무실(대구 계림여관)에서 연락 서신을 작성하던 중,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붙잡혔다. 1940년 이후에는 예천군 유천면에서 학숙(學塾)을 열고 문인(門人)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운강문집(雲崗文集)』을 정리하고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위한 자료를 정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