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억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제주목사,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대숙(大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8년(숙종 24)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장령|부교리|제주목사|승지|대사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제주목사,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숙(大淑). 한석준(韓碩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한빈(韓彬)이고, 아버지는 한중희(韓重熙)이며, 어머니는 김경(金澋)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성균관시험에 2등하여 전시에 곧바로 나가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3년 사간원정언으로 노론 당론을 펴던 대사간 김치후(金致垕)를 옹호하는 언론을 펴다가 해도(海島)로 유배당하였다. 1737년 석방되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입록되었고, 수찬을 지냈다.

이듬해 북평사로 나가서 흉년에 구제된 자를 노비로 삼는 법의 제정을 상계(上啓)하여 허락받았다. 경직에 돌아와서 지평·헌납·수찬 등 언관직에 있으면서 노론 당론을 행사하여 소론 이광의(李匡誼)와 민창수(閔昌洙)의 석방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작당하였다.

1743년 헌납·장령·부교리·사간 등을 지냈고, 제주의 대기근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진휼 업무를 위해 특별히 제주목사에 발탁되었다. 이후 승지·대사간을 지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