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숙(大淑). 한석준(韓碩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한빈(韓彬)이고, 아버지는 한중희(韓重熙)이며, 어머니는 김경(金澋)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성균관시험에 2등하여 전시에 곧바로 나가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3년 사간원정언으로 노론 당론을 펴던 대사간 김치후(金致垕)를 옹호하는 언론을 펴다가 해도(海島)로 유배당하였다. 1737년 석방되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입록되었고, 수찬을 지냈다.
이듬해 북평사로 나가서 흉년에 구제된 자를 노비로 삼는 법의 제정을 상계(上啓)하여 허락받았다. 경직에 돌아와서 지평·헌납·수찬 등 언관직에 있으면서 노론 당론을 행사하여 소론 이광의(李匡誼)와 민창수(閔昌洙)의 석방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작당하였다.
1743년 헌납·장령·부교리·사간 등을 지냈고, 제주의 대기근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진휼 업무를 위해 특별히 제주목사에 발탁되었다. 이후 승지·대사간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