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신보(愼甫). 한경생(韓慶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유량(韓有良)이고, 아버지는 한두유(韓斗愈)이며, 어머니는 이항(李杭)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학(四學) 유생으로 송시열(宋時烈)의 소환을 요구한 바 있었고, 169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직장으로 도봉서원의 『청금록(靑衿錄)』에서 윤증(尹拯)의 이름을 먹으로 지운 혐의로 나문(拿問)당하였다가 풀려 났다.
이 때문에 청요직에 오를 때 주위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04년 지평으로 송시열의 업적을 찬양하고, 만동묘(萬東廟)의 건립, 재용 절감, 군역 폐단을 바로잡을 것 등을 주장하였다.
노론 당론을 주창하여 소론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소론 조태억(趙泰億)은 그의 전주판관 재직시 백성을 침탈한 사건을 논핵하여 노·소론간의 치열한 대립이 일어났다. 1713년 장령·정언·필선을 지냈고, 이후 성천군수로 나갔다가 1716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