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직경(直卿). 한승권(韓承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경우(韓景祐)이고, 아버지는 한영(韓瀛)이며, 어머니는 정유일(鄭惟一)의 딸이다. 한정국(韓定國)의 아우이다.
1616년(광해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대술(代述)의 의심이 있었다. 승정원가주서, 겸설서·설서를 역임하고 1619년 예조좌랑으로서 과거시험을 함부로 차지하고 사치한 죄로 파직, 추고되었다. 영변통판(迎邊通判)으로 내려가 있다가 살인혐의로 물러났다.
1622년(광해군 14)에 지평이 되었다. 같은 해 5월에 헌납으로 있던 형 정국이 중국 황제의 사은(賜恩)에 대한 대례(大禮) 문제로 피혐한 일을 처치할 때 상피하지 않았다는 대사간 유대건(兪大建)의 비난을 받은 일로 인피하면서 공박을 주고 받았다.
이들의 대립은 이후 박홍도(朴弘道)·한효중(韓孝仲) 등의 죄상에 대한 탄핵과 아울러 이귀(李貴)의 죄를 파직에 그치게 한 대사헌 남근(南瑾)을 비난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리고 1622년 말부터 이귀 등이 김자점(金自點)과 더불어 서궁(西宮)을 부호한다고 비난하면서 서궁을 폐하자는 정청(庭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이이첨(李爾瞻)에 붙어 공동으로 흉론을 주창한 죄로 형과 함께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