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당진(唐津). 자는 시중(時仲). 한섭(韓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윤우(韓允祐)이고, 아버지는 한근(韓瑾)이며, 어머니는 이평(李泙)의 딸이다.
문음으로 출사하였다가 1531년(중종 26)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2년 뒤에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주서와 설서를 거쳐 1537년에는 특별히 두 자급을 뛰어넘어 6품의 시강원사서가 되었으나 외람되다는 이유로 개정되었다.
이후 검토관·수찬·교리·지평·시독관·집의·사간·응교 등 거의 청요직 만을 거쳤으며, 1543년에는 재상어사로 발탁되어 평안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에서 관련자의 공초에 그의 형인 한숙(韓淑)의 이름이 드러나 형은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에 그 여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대사헌 윤원형(尹元衡) 등이 다시 치죄를 청하였을 때 변방에 안치되었다.
당시 사재감정이었던 그는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1547년(명종 2) 9월에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는데 이에 연루되어 이성(利城)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1565년에 을사사화 당시의 피죄자들의 원통함을 공언하면서 그 죄의 경중을 다시 분간하여 역모에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분류됨으로써 장단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대간이나 시종의 직임에 직첩을 환급하고 서용하라는 명이 있어 벼슬이 첨지에 이르렀으나 방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