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청양 출생.
향리에서 서당교육을 받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충격을 받고 홍성의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를 찾아가 합류하고, 항일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 뒤 독자적으로 충청남도 홍산(鴻山) 지치(支峙) 마을에서 청년 수십 명을 모아 기병(起兵)하여 이웃인 구병(九兵)·문장(文章)·서천(舒川) 등지와 홍주성 교전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06년 5월에는 서산·해미·예산·대천·광천 등지에서 청년을 모아 의병부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에 발각되어 붙잡힐 뻔하였으나 동지와 같이 변장, 탈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1916년 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 일행 100여 명이 방문할 때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저격, 사살하기 위하여 동지 10여 명과 함께 계획을 치밀히 세웠으나 무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귀국한 임시정부 요원 한우석(韓禹錫)이 붙잡힘에 따라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9년 1월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의 부호 정순학(鄭淳學)에게 군자금을 요청, 그로부터 200원을 받아 나오다가 잠복 중이던 일본형사에게 붙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