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원이(遠而), 호는 도천(道川). 별제 한극공(韓克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한천뢰(韓天賚)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효중(韓孝仲)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언형(李彦亨)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가 되었다. 그 때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 유생들의 가계·학통·학업 등을 기록한 문서)에서 삭제했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받았지만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선교랑(宣敎郎)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저작·봉상시직장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뒤에 주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후에는 충청도선유어사(忠淸道宣諭御史)로 나간 바 있고,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정랑·성균관직장 등을 역임하고, 정언·집의 등 8년 동안 대간으로 봉직하였다. 그리고 통정으로 승계하여 동부승지·우부승지·병조참지·여주목사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을 방어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嘉善)으로 승계하였다. 예조·병조·형조의 참판과 한성부서윤 등을 역임했으며, 효종 때에는 역시 예조참판·도승지·특진관·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가의(嘉義)에 승계했고, 1660년에 졸하였다.
성품이 안온해 직언은 하지 않으면서도 왕을 잘 보필하였다. 또한 교결(皎潔)의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으나 행위가 깨끗했으며, 이름난 학자는 아니지만 어리석음을 능히 깨우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