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연간에는 1587년(선조 20) 곽산군수, 1594년 온성부사, 1603년 창성부사 등 주로 외직을 전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경상병사로 있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좌변포도대장으로 있을 당시 서얼인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소위 강변칠우(江邊七友)의 강도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맨 먼저 체포된 박응서에게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그는 이 사건을 역모로 꾸며 고변하도록 유인하고 서양갑 등을 무고함으로써 마침내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또한 유폐 사사케 하였다. 그 뒤 1615년에 경기수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계축년의 공으로 지중추부사와 수사(水使)에 제수되었다.
이후 지사, 비변사 당상을 거쳐 1619년 7월에는 팔좌(八座)의 하나인 형조판윤에 이르렀으니, 박응서의 옥사를 일으킨 공으로 승진한 것이다. 1622년에는 다시 좌변포도대장을 맡았으며, 공홍병사와 군기시제조를 역임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마자 평안병사로 있던 그는 이듬해 1월에 박응서와 함께 주살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