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광집 ()

해광집
해광집
유교
문헌
조선시대 때의 학자, 송제민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83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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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때의 학자, 송제민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83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783년(정조 7) 송제민의 5대손 송익중(宋益中)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종수(金鐘秀)의 서문과 권말에 고광선(高光善)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2권 2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에 소모호서의병문(召募湖西義兵文)·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만언소(萬言疏)·상체찰사이공서(上體察使李公書) 각 1편, 권2에 부록으로 유사·행장·묘지명, 저자의 애국충절을 칭송한 제현들의 만사(輓詞)·제문·봉축문(奉祝文)·상량문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끝에 백윤화암공행장(伯胤花庵公行狀)과 명행기(名行記)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모호서의병문」은 제목만 있고 본문은 실려 있지 않다. 주(註)에 의하면, 해미현(海美縣)의 이래(李萊)라는 사람의 집에 전해 왔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소모호남의병문」은 1592년(선조 25) 전라도 여러 고을의 수령과 유향소(留鄕所) 및 향교의 훈도(訓導)와 당장(堂長)·유사(有司)들에게 보낸 통문(通文)이다. 당시의 전쟁 상황을 적고,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식량 보급 및 의병 모집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에서 활약하던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 여러 장수의 업적을 설명하였다.

「만언소」는 1600년(선조 33)에 작성한 소였으나 당시 도신(道臣)의 저지로 임금에게 상달되지 못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과 다시 화친할 수 없는 명분과, 국력을 신장해 복수해야 한다는 이유를 해박한 역사 지식으로 예증하면서 설명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교적(驕敵)·용간(用間)·양민(養民)·교사(敎士)·임상(任相)·임장(任將)·지일(志一) 등 일곱 가지로 나누어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특히, 용간은 낙서(洛書)의 원리를 이용하고 글자의 편방(偏傍)을 응용해 만든 암호문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세와 도로·인심·풍속·물정·사세(事勢) 등을 조사하도록 자신을 일본에 밀정으로 파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상체찰사이공서」는 당시 체찰사로 있던 이항복(李恒福)에게 올린 편지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피랍된 후 그 곳에서 죽은 두 아들에 관한 일을 적고, 이런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 대한 복수와, 앞으로의 재침에 대한 예방책으로 용간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밖에 「백윤화암공행장」은 아들 송타(宋柁)가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배에 타고 있던 우리나라 포로들을 규합해 왜적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중 다른 왜선에 발각되어 도륙당한 사실을 기록한 글이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의병활동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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