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교향악단 단원이 중심이 되었고 창단 당시에는 해군정훈음악대로 부르다가 뒤에 해군교향악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6·25전쟁으로 격앙된 국민감정을 순화시켜주고,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던 북한 동포들에게 진정한 민주주의의 음악을 들려주자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51년 10월에 창단연주회를 가졌는데, 해군창설 5주년과 수도탈환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겸하였다. 관현악 지휘는 김생려(金生麗), 합창 지휘는 은하수, 군악 지휘는 김준덕(金俊德)이 맡았고, 이흥렬(李興烈)의 「승리의 노래」, 박재훈(朴在勳)의 「새나라 세우자」 등을 연주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축하연주회와 기념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1951년 11월에는 미국부통령 한국방문기념연주회, 1952년에는 스펠만대주교 내한기념연주회를 갖는 등 전시(戰時)의 음악문화 담당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1952년에는 다량의 악기를 미국에서 구입하여 질적 향상을 꾀하였으나, 1953년 3월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때 대부분의 악기와 악보가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3년 9월 환도 이후 본격적으로 교향악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 한국교향악협회가 사단법인체로 발족한 것을 계기로 명칭이 해군교향악단으로 바뀌었고, 운영체제도 군소속에서 군과 민간의 협동체제로 바뀌었다.
1957년에는 동남아시아 예술사절단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을 순회, 연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순수한 민간단체인 서울교향악단으로 재출발하였다. 6·25전쟁 전의 고려교향악단과 전쟁 후의 서울교향악단을 이어주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사변 중에도 교향악운동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이어주었다는 데 한국양악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