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에는 하천단(河千旦)의 글로 「해동종수좌관고(海東宗首座官誥)」와 「해동종승통교서(海東宗僧統敎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해동종이라는 이름은 여기 외에는 보기가 힘들며, 조선 초의 11종파 이름에도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 종파 이름을 바꾸었거나 아니면 후대에 오면서 종파의 구실을 못할 만큼 쇠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종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종지(宗旨)가 무엇이고 어떠한 내용의 종파였는지에 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고려의 문신 김구부(金龜符, 1089-1145)의 묘지명에 그의 셋째 아들 담천(曇闡)에 관하여 “해동종(海東宗)을 창시한 정림(正琳)에게 의지하여 수계를 받고 대덕(大德)이 되었다.”(曇闡, 依海東宗創師正琳, 受具爲大德.)라고 기록한 내용이 보이나, 정림(正琳)의 자취를 추적할 만한 자료는 아직 학계에 보고된 것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관고(官誥)나 교서를 통하여 해동종의 한 모습을 조금은 엿볼 수가 있다.
즉, 「해동종승통관고」에 “신라 때의 원효가 백가의 이론을 화합 조화하고, 두 갈래의 법문을 하나로 돌아가게 하였다(爰及曉公 挺生界代 和百家之異諍 合二門之同歸). ”는 구절과 “이 금강삼매를 얻어서(得此金剛三昧)”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해동종은 신라의 원효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저서를 중국에서는 해동소(海東疏)라 하였으며, 원효의 이름이 해동종 관고 속에 들어 있고, 또 그의 불교사상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 원효와 관계가 깊은 종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강삼매의 글귀까지 보이고 있으므로 원효와 관계된 종파였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또한, 「오교양종(五敎兩宗)에 대(對)하여」라는 논문에서는 해동종을 법성종 · 중도종 · 분황종 등과 동일한 종파로 보고 원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