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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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제도
조선 말기에 경기 · 황해 · 충청도의 수군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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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말기에 경기 · 황해 · 충청도의 수군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
내용

일명 해방영(海防營). 1883년(고종 20) 12월 5일 고종이 경기도 연해 지방 해방병포(海防兵砲)의 훈련을 통할시킬 목적으로 독판통상사무아문(督辦通商事務衙門) 민영목(閔泳穆)을 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로 임명한 데서 비롯되어, 이듬해 1월 4일 부평부(富平府)에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수군을 일괄 절제(節制)하였고, 이어서 연해의 약 2,000여 군병(軍兵)을 통할하였다. 그러던 것을 같은 해 4월 경기도와 종전의 경기·충청·황해도의 수군 및 연해 육군을 통할하던 통어영(統禦營)의 범위가 축소됨으로써 그 밑에 있던 수군이 이 군영으로 속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강화부까지도 이 군영의 관할로 들어와 그 기능이 한층 강화되어, 군영의 최고책임자인 해방총관(海防摠管)이 강화유수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 후 총융청(摠戎廳)에 소속되었던 남양·파주·삭녕·마전·고양·교하·양주·적성·연천 등 여러 읍의 속오군(束伍軍)도 이 군영에 속하게 되었다. 1885년 3월 이 아문의 기지인 부평부가 항구에 가까워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용산방(龍山坊)만리창(萬里倉)으로 옮겼다. 이 후 병력은 계속 늘어났는데, 같은 해 5월에는 송영(松營)의 신련군(新練軍)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다.

1886년 3월 다른 군영의 명칭 예에 따라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군제(軍制)는 총융사영(摠戎使營)을 모방하여 시행되었으며, 최고책임자의 명칭은 총관기연사무(摠管畿沿事務)에서 기연해방사로 바뀌었다.

이 아문은 본래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군제 변통(軍制變通)과 함께 신설되었던 것으로, 1888년 4월 또 한 번의 군제 변통을 겪게 됨으로써 친군오영(親軍五營)의 우영(右營) 및 후영(後營)과 함께 하나로 합하여져 통위영(統衛營)으로 재편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일성록』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육군본부, 1977)
집필자
홍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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