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金日成)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빨치산 활동을 한 혁명1세대이다. 소련 하바로프스크 지역으로 월경(越境)한 이후 1942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 붉은군대 제88특별저격여단) 제3영 제5련 제1배장을 지냈다. 1949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 1주년을 맞이하여 국기훈장 3급을 수여받는 등 인민군 창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제1군단 제4사단(사단장 李權武) 참모장으로 참전하였다.
1951년 2월 조선인민군 제4군단장(소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6월 중장으로 승진하여 군사사절단원으로 소련·체코슬로바키아·중국·북베트남 등을 순방하였다. 1959년 1월 군사대학 총장, 5월 제2집단군 사령관, 1960년 2월 민족보위성 부상(副相), 8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되는 등 이 무렵 인민군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1961년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에 임명되었다.
1962년 5월 상장(上將)으로 승진하고, 같은 해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및 법제위원을 맡았다. 1963년 1월≪로동신문≫에 논문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은 불패의 혁명적 무장력이다>를 발표하여 인민군의 전통을 만주항일빨치산 활동으로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63년 2월 대장으로 승진, 같은 해 10월 ‘중국인민지원군 한국전쟁 참전 13주년 기념 평양시민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965년 6월≪로동신문≫에 논문 <미제는 조선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라>를 발표하였다.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대표자회 집행부 성원이 되었고, 대표자회 기간중 열린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겸 대남담당 비서로 선출되었다. 1967년 4월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노동당 직할 남조선국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2월 영웅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1969년 1월 조선인민군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공개된 ‘군부 강경파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생명을 마감하였다. 당시 숙청 이유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에 저항하고, 인민군 내에 군벌주의·관료주의를 조성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