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사건은 1937년에서 이듬해까지 걸쳐 발생한 항일조직사건이다. 1937년 9월부터 1938년까지 일본 관헌 측이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 습격작전 후 국내 연계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이 기소된 사건이다. 일본은 이 작전에 가담했다가 재차 지령을 받고 혜산읍에 잠입한 3명이 체포된 것을 단서로 관련자들을 색출했다. 사건이 종료된 후 함경남도 국경지방 항일조직과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혜산사건은 일제시대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 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사건이었다.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일본 관헌 측이 김일성(金日成) 부대의 보천보(普天堡) 습격작전 후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188명이 기소된 사건이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의 부대가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함으로써 일본 관헌 측은 상당히 당황하였다. 최초로 항일빨치산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 데다, 그 결과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그들의 존재가 국내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일성 등에게 이 작전의 성공은 커다란 자신감을 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에서의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 사업, 항일연군 여성대원들의 만주 장백현(長白縣) 거점 정착사업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보다 역점이 두어진 사업은 조국광복회 조직의 조선 내부 확대사업이었다. 기존 갑산공작위원회(甲山工作委員會) 조직 외에 신갈파, 흥남 · 원산 · 무산 · 성진 · 명천 등지에 직접 공작원이 파견되었으며, 흥남에서는 조국광복회 지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 관헌 측은 보천보작전 후 필사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1937년 9월 이 작전에 가담했다가 재차 지령을 받고 혜산읍에 잠입한 3명이 체포된 것을 단서로 10월까지 관련자들을 색출하였다. 10월 10일에는 군경을 월경시켜 보천보작전에 앞서 보천보를 정찰하고, 도강과 전투를 지원했던 권영벽(權永壁) 등 8명을 장백현에서 체포하였다.
이후 11월 중순까지 조선 내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되어 양 지역의 조국광복회 조직은 궤멸되었다. 1938년 9월 마지막으로 동만특위(東滿特委) 산하 조선파견지부 책임자 박달(朴達) 등이 체포되면서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은 총 739명, 그 중 188명이 기소되었다.
1941년 8월 함흥지방법원에서 권영벽 · 이제순(李悌淳) · 박달 등 6명이 사형, 박금철(朴金喆) 등 4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유기징역은 15년 4명, 13년 6명, 12년 9명, 10년 18명, 8년이 14명이었으며, 7년 이하가 104명이나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박달만이 병으로 집행이 연기되어, 1945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와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 분명해졌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 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 등의 경력이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어,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혜산사건이 종료된 후 함경남도 국경지방 항일조직과 만주항일무장투쟁 세력과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박금철 · 이송운(李松雲) · 허학송(許鶴松)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북한체제 건설과정에 중요한 자원으로 참여하였으나, 1967년 이른바 ‘갑산계사건(甲山系事件)’으로 대부분 숙청되었다. 사건의 배경과 판결 결과, 그것의 파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일제시대 항일조직사건 중 국내외 조직이 대규모로 연결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