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암(孔巖: 지금의 서울특별시 양천구). 호부상서 허재(許載)의 아들이다.
1126년(인종 4) 아버지가 이자겸(李資謙)의 일당이었다고 하여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로 좌천되자, 아울러 전주방어판관으로 쫓겨났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로 내시지후(內侍祗候) 정습명(鄭襲明), 잡직서영(雜職署令) 왕식(王軾)과 더불어 서경의 서남해도(西南海島)에 가서 수군과 전함을 징발하여 순화현(順化縣: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남강(南江)에서 적의 배를 막았다.
1149년(의종 3)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을 바쳤고, 1155년 시형부시랑(試刑部侍郎)으로 동북면 병마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