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이다. 당대 고관의 서자(庶子)로서 글을 잘하여 이름이 있었으나, 신분상의 제약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현실을 비관하고 1609년(광해군 1) 같은 서자 출신인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종인(朴宗仁)·유인발(柳仁發) 등과 함께 여주 북한강 가에 살면서 강변칠우라 자처하였다.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고 생활이 사치스러워 행적을 의심받던 중 1613년 문경 새재[鳥嶺]에서 행상을 죽이고 은(銀)을 강탈한 사건의 범인으로 다른 일당과 함께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대북파의 사주를 받고 박응서가 김제남(金悌男)과 밀통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도둑질하였다고 허위자백하여 계축옥사를 유발시켰다. 그 결과 김제남은 즉각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유배당하였으며, 이들도 모두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