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현병근(玄炳瑾). 호는 하죽(河竹). 평안북도 박천 출생.
1919년 3·1운동 후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한족회(韓族會)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여, 1922년 통의부(統義府)가 발족될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갔다.
1922년 8월 한족회·광복군총영·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서로군정서·광한단·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등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봉천성 환인현(奉天省桓仁縣)에 모여 출범시킨 대한통의부의 법무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 11월 길림(吉林)에서 양기탁(梁起鐸)·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에 선임되었으며, 그 뒤 중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뒤 정의부·신민부(新民府)·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등의 3부 통합이 실패하자, 1929년 4월 신안둔(新安屯)에서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될 때 법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30년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국민부를 전복시키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충칭(重慶)으로 탈출하였다. 1936년 김성숙(金星淑) 등과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고 주석에 취임하였다.
그 뒤 치장(綦江)에서 열린 회의에서 산재한 여러 개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이동녕(李東寧)의 지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집결시키는데 합의하여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