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挾戶’·‘狹戶’·‘夾戶’ 등으로 표기되어 왔는데, 모두 동일한 뜻으로 쓰였으며, 남의 집 협호를 빌려서 딴살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협호살이’라고 불렀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협호는 지주의 소유로 되어 있었으나, 머슴이나 소작인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호살림이라는 말에 경제적 빈곤 이외에 사회적 차별의 의미가 내포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협호에 사는 사람을 ‘협방인(挾房人)’ 또는 ‘차호인(次戶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협호를 무료로 사용하는 대신 농사일·집안일에서부터 급수문제 등 자질구레한 일까지 지주에게 봉사하였다. 이들은 협호에 거주하면서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는 한편, 주인집 가사의 잡역을 돌봐 주고 수시로 식사를 제공받았다. 명절이나 손님이 왔을 때 밥상·술상을 운반하기도 하고, 잔치나 제사 때에는 주인이 이들을 데리고 가서 물건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주인과 협호인 간의 사회적 관계는 원채와 협호의 관계처럼 예속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컨대, 주인은 협호인에게 말을 놓았으며, 협호인은 주인에게 경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신분 해방이 되면서 협호인과 주인의 관계는 신분적 예속을 점차 벗어나서 경제적 의존관계로 변화하였다.
협호인은 지주의 땅을 소작하는 대신 소작료를 지불하였으며, 협호를 사용하는 대신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과거처럼 인신적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농촌의 이촌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농업노동력이 부족해짐에 따라 협호인이 주인에게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도 점차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오늘날은 남의 집 협호살림을 하기를 꺼릴 뿐만 아니라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오늘날 협호는 과거의 주인을 잃은 채 빈 창고 구실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