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신씨(申氏). 호는 혜월(慧月). 충청남도 예산 출신. 1871년(고종 8) 덕숭산 정혜사(定慧寺)로 출가하여 안수좌(安首座)의 제자가 되었고, 1884년에 경허(鏡虛)로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 修心訣≫을 배우다가 깊은 뜻을 깨달았으며, 1901년 오도하여 경허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1908년부터 도리사(桃李寺),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 울산미타암(彌陀庵), 통도사, 천성산 내원사(內院寺) 등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특히, 무소유(無所有)와 천진(天眞)으로 생애를 일관하여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파계사 성전에 있을 때에는 함께 있는 동승(童僧)에게 ‘큰 스님’이라 부르면서 존대하였고,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승려들에게 포식을 시키기 위하여 소를 판 뒤, 소를 찾는 주지 앞에서 발가벗고 소걸음을 흉내내며 소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또한, 평생 동안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一日不作一日不食’의 생활을 준수하였고, 가는 곳마다 불모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만공(滿空)의 사찰건축, 용성(龍城)의 역경(譯經), 그의 개간사업을 높이 받들어, 이들 세 고승을 당대의 3대걸승이라 하였다. 내원사에 있을 때에는 손수 산 2,000여 평을 개간하여 훌륭한 논으로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세 마지기의 논을 마을사람의 요청으로 팔게 되었다.
대금을 받아 돌아왔으나 그 돈이 두 마지기 값밖에 되지 않자 제자들이 힐책하였다. 이 때 “논 세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 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가 아니냐! 욕심이 없는 승려의 장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언제나 보시를 행하고 꾸밈없이 행동하며, 근면탈속의 탐욕이 끊어진 근래의 희유한 승려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부산 범일동 안양암(安養庵)에서 제자 운봉(雲峰)에게,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진실한 모습이 없다.
그 모습의 뜻이 무상임을 알면 그것을 이름하여 견성이라 한다(一切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義無相 卽名爲見性).”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